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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비된화살 Aug 23. 2023

엄마에게 유산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현금으로

엄마는 10여 년 전 서울에 사시다가 시골로 귀촌하셨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가 팔십이 막 되신 해


불현듯 나에게 죽음을 준비하는 책을 몇 권 사다 달라고 하셨다. 엄마는 워낙 책을 좋아하시고, 전부터 노인대학의 강의를 하셨던 터라 '노인에 대한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그러시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웰다잉에 대한 책을 서너 권 사다 드렸다.


그 이후 설날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가족이 모이면 늘 예배를 주도하셨던 엄마가 사위인 남편에게 명절예배를 주도하라고 했다(우린 기독교 집안이라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는 몇 날 며칠 준비하셨을 조기구이, 닭볶음탕, 취나물무침, 호박나물볶음, 고춧잎나물무침과 감자튀김 그리고  인삼튀김을 큰 접시에 담아 한 상 차리시고는 우리에게 많이 먹으라며 고봉밥을 퍼 주셨다.


천천히

꼭꼭 씹어서

많이 먹어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꺼번에 많이 먹지 못하고 조금씩 자주 먹었다.

소화력이 떨어지는지 위가 작은지 알 수는 없지만 성인이 되고, 중년이 된 지금까지도

밥을 빨리 많이 먹으면 곧 체하기 일쑤였다.


그걸 너무나 잘 아는 엄마는 천천히 먹지만 꼭꼭 씹어야 하고 그리고 많이 먹으라는 말을 꼭 한 번씩 하셨다.

엄마니까, 엄마라서, 엄마의 세계관에서나 가능한 어려운 주문을 그렇게 내게 했다.




어느 날은 여섯 살 차이 나는 동네 언니를 소개해줬다.

"신옥이(가명)는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이곳 동네 사정도 잘 알고 사람들도 잘 알고 그러니까 친하게 지내 그러면 나중에 너에게 많은 도움을 줄 거야"


갈 때마다 신옥이 언니와 밥을 같이 먹게 하고, 신옥이 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나도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 언니와의 수다가 나쁘지 않았다.

더불어 시골 생활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은근히 재미있기도 했다.




엄마 나이가 팔십 중반에 접어들 때부터 엄마는 키도 줄어들고 마음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엄마랑 대화하면 끝날 줄 몰랐던 수다가 그날따라 뚝뚝 끊겼고, 엄마는 먼산을 자주 봤다.


"엄마 하늘나라 가면 네가 이 집을 관리하면 좋겠어"


가끔 와서 쉬었다 가고, 사람들 하고도 와서 놀라고 하셨다. 그만큼 엄마는 집을 좋아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핸드폰에 입력하라고 하셨다.


"엄마 통장 비밀번호는 ****야 나중에 잊어버리지 않게 잘 기억하고 있어라"




엄마는 가난하다.

시골의 빈 집 하나 얻어 이것 고치고, 저것 고친 후

삐그덕 거리는 밤색 침대 하나, 오래된 검정 자개장 하나, 누군가가 쓰다가 준 3인용 소파 하나 그렇게 두고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는 말을 10번은 더 하셨다.

그런데도 마치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감나무의 감을 이웃과 나누고, 오이를 따서 옆집 아주머니에게 드리고, 내가 사간 과자며 과일을 주저하지 않고 옥이 언니에게 주고 앞집 할머니에게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내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엄마가 그동안 모아둔 거야 너한테 이게 도움이 되어 봤자 얼마나 되겠니 하지만 엄마는 돈이 필요하지 않으니 가지고 가"

봉투에 내 이름이 크게 쓰여 있었다.




엄마는 말했다.
"150만 원이야"





나는 화난 사람처럼 봉투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정말 150만 원은 내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고민하던 우리 집 리모델링도,

마침 바꾸려고 했던 차를 구입하는데도...



그렇게 봉투를 가방 속에 넣고 돌아오는 길




내 이름이 크게 쓰여 있는 봉투를 보고 또 보고 또 봤다.

그 안에 마치 150만 원의 100배가 들어 있는 것처럼 마음이 울렁거려서 정말 도저히 열어볼 수가 없었다.


그 봉투를 내게 내미는 엄마의 손길에서,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서

"얘야 이게 엄마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유산이란다."라고 말씀하시는 거 같았다.


엄마는 본인을 위해 고작 150만 원을 모아 놓으셨고, 그나마도 필요치 않으니 내가 정신이 말짱할 때 네게 주는 거라는 소리가 메아리쳐 계속 들려왔다.




엄마는 그렇게 노년을 차곡차곡 꼼꼼히 정리해 나가고 계셨다.




나는 금수저다.

엄마에게 너무나 많은 정신적 유산을 받았기에 나는 정서적 금수저가 확실하다.



엄마는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웰다잉을 준비하고 있었다.


난 내 이름이 또박또박 쓰여 있는

그 흰 봉투를

열어보지 못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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