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 같던 내 빠개진 '처음'에게 올림.
'계절감'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평균적으로 우리나라에 사계가 있다고 쳤을 때, 각기 계절이 주는 고유의 느낌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각각의 계절이 주는 그 계절감은 확연히 차이가 있다.
나의 첫 번째 남자친구. 친구 같은 연애. 그와의 연애는 마치 초여름 같았다. 무언가 미숙하고, 어리숙하지만 그 나름대로 싱그럽고 순수했다.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고, 불완전하던 '내'가 그 속에 있다. 대학교 시절 만난 그와 나는 1년 동안 제일 친한 오빠 동생 사이였다. 처음 대학에 들어가고, 저 멀리서 검정 봉지를 빙빙 돌리고 오는 그를 우연히 봤을 때, 정말 저런 사람은 사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 백수 같았다)
계속 보니 정이 들었다. 못생긴 놈한테 빠지면 답도 없다고, 여러 친구들과 단체로 계속 얼굴을 보다 보니 서로 은근슬쩍 감정이 생겼다.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었고, 대화가 통했다. 밤새 이야기를 해도 재미가 있고, 웃음이 났다. 편한 오빠동생사이에서 어느샌가 정말 남자친구, 여자친구 사이가 되어있었다.
혈혈단신 유학생활을 하면, 아무래도 남녀가 서로 의지하게 된다. 함께 공부하고, 놀며 하루를 보내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같은 날 대학을 무사 졸업했다. 서로가 서로를 지우면, 대학생활이 없어질 것 같다고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었다. 친구 같은 연인관계. 제대로 된 연애가 처음이었던 나에게 그는 베풀고, 나누는 법을 알려준 친구였고, 처음으로 내 모든 걸 가장 가까이 많은 것을 공유해 본 이성친구였다.
문제는 졸업 후 찾아왔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잘 맞는다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떨어져 있을 일이 없으니 싸울 일도 많지 않았던 걸 몰랐다. 졸업 후 한국에 돌아온 그는 군대로 갔다. 심지어 그 반짝이는 해병대 반지에 이끌렸던 건지, 해병대로 떠났다. 그 당시 멋모르던 나는 멋진 의경 오빠를 하면 안 되냐고 졸랐는데, 네가 군대 갈 거도 아니면서 왜 그러냐고 씅을 내더니 해병대를 자원입대. 그 후 받은 훈련소 편지엔 눈물 젖은 후회의 말들이 그득했다. 나중에 그는 박격포병이 되었고, 백령도에서도 4시간을 더 배 타고 들어가야 한다는 연평도에 당첨되어 근무했다.
처음엔 좀 나이 든 고무신이 된 것 같아 (바야흐로 24살 때쯤..) 부랴부랴 곰신 카페도 가입해 보고, 정말 구구절절 편지도 줄줄이 써 보냈다. 해병대 훈련소에서 그 당시 온라인 편지를 하루에 1통만 받을 수 있었는데, 뭣도 모르고 잽싸게 편지를 보냈다가 그의 둘째 누나에게 질투 어린 욕을 잔뜩 먹은 적도 있었다. 훈련소 기간 중간중간 필요한 물품도 보내고 박스에도 정성스레 편지를 쓰고, 혹시 반입불가 물품이 있으면, 못난 나를 용서하라는 오글거리는 편지도 보냈다. (이니스프리에서 위장크림이라는 걸 판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클렌징크림은 반입불가라서, 편지에 샘플을 붙여 보내기도 했다.. 참으로 아련하고 아찔한 나의 첫사랑이다.
그렇게 서로 1년 반정도를 떨어져서 지냈다. 한창 취업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나대로 힘들었고, 늙은 군인의 신분이 된 그 또한 아주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시간들이 찾아왔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치여서 이해할 여력이 없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처음엔 그가 말을 잘하고, 많이 해서 좋았는데, 어느샌가 제발 그 입 좀 닫고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아직 군대를 제대하지 않았으니, 대우받으려 하지 말라고, 진짜로 제대하면 그때 꽃신으로 인정해 주겠다고 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힘들다고 이야기하면, 정말 미친 듯이 노력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던가, 아니면 어차피 평생 일하고 살 거, 좀 더 여유를 갖고 그냥 놀라고 했다. 박격포를 쏘고, 극기훈련을 하는 그에게 나의 고민은 너무나도 순한 맛이었을 것이다. 맞는 말이어도, 남자친구한테 듣고 싶은 달콤한 말은 아니었다.
이별을 결심한 결정적인 사건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휴가를 나와 만만의 준비를 맞추고 서로 만났다. 그때 내 생일 주간이었는데, 다이소에서 파는 생일케이크 모자를 사주고, 꽃다발을 사줬다. 그리고 생일 선물이 없었다. 길기다 맘에 드는 거 있으면 고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대화 중에, 30만원짜리 구찌벨트를 아버지 선물로 샀다고 했다. 갑자기 억하심정이 몰려오고, 60대 노부부도 아닌데 연애 중인 우리의 관계에 그가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는 결국 혼자 결심을 내렸다. 너무 자주 서운하고, 싸우고, 항상 감정 소모가 짙어지고, 마음이 식는다는 게 뭔지 느꼈다. 군대 간 사람 건들지 말라고 부모님이 그렇게 말렸는데, 그래도 그때는 내가 더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나를 소중히 대해 준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이 정도면 됐다,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런 생각뿐이었다.
전화하면서 또 싸우다가, 내가 싸우는 게 지겨워 아무 말을 안 했다.
왜 아무 말 안 하냐고 하길래, 조금 더 뜸을 들였다. (아마 그는 눈치챘을 것이다. 눈치가 빠른 셋째 아들이었다.)
"오빠 우리 헤어질까?"라고 말하니, 너 지금 네가 한 말에 진심으로 책임질 수 있냐고 난리를 쳤다.
그래서 다시 울면서 "아.. 아니 안 헤어질래." 하니까 장난하냐고 다시 또 난리를 쳤다.
그래서
"그냥 헤어질래." 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너 말에 책임질 수 있냐고 묻더니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연락을 끊었다.
내 인생 첫 연애. 만남도 서툴고, 헤어짐도 서툴렀다. 오랜 연애의 참으로 허무한 결말이었다. 나는 그와 헤어지면 세상이 두 동강 나는 줄 알았다. 엄청난 죄를 진 느낌이었다. 그래도 너무 힘들었기에 내려놓았다.
만남과 이별 속에서 성숙해진다. 다만 또 다른 사랑이 지저귀는 새처럼 우연히 날아오고. 또다시 사랑할 뿐이다. 그와의 연애엔 어둠도 많았지만, 빛도 많았다. 그래도 싱그럽고 순수하던 그때의 내가 그리워 그 연애가 그리울 때가 있다. (아주 간혹.)
P.S.
오빠 혹시 돌잔치했어? 어떻게 지내나 가끔 궁금하다. 한때 오빠는 나한테 전부였는데. 오빠를 좋아했던 그때의 내가 그리워서 오빠가 밉기도 하고 그립기도 해.
행복해 오빠.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