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샘비 Jan 27. 2023

부치지 않은 편지

어제의 단상_#17

#17 부치지 않은 편지


학기가 끝나고 1학년 학생에게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극단화된 개인주의로 인한 혼란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무관심에 무관심으로 답하는 분위기에 적응하는 게 녹록지 않았나 보다. 질문의 요지는 이러했다. "우리는 어째서 약자(혹은 타자)를 배려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무엇을 믿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대화의 전제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가능한 건 누구나 알 만한 뻔한 이야기밖에 없다.


늦었지만 뻔한 말을 늘어놓아 보려 한다.



편지를 읽고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답을 해야 하는지. 답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어느 것이 더 나은 선택인지. 늦었지만 답장을 씁니다.


저는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게 답을 구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저는 스스로를 젊은 세대라고 느끼지만, 학생에게는 기성세대겠지요.) 세상과 부딪치면서 직접 답을 얻어야만 기성세대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떤 답이든 옳은 답일 것입니다. 기성세대가 만든 사고의 틀에, 보편과 상식이라는 말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더 나은 미래는 오지 않겠지요. 그러니 비판의 눈으로 제 이야기를 읽어주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질문의 요지를 "약자(혹은 타자)를 도와주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로 이해했습니다. 배경에 대한 이해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의도는 같을 거라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접근법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두 가지로 간단히 답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 우리가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데 있어 '타자적 삶'보다 더 강력한 잣대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왜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또 다른 물음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우리 삶의 당위라고 생각하지만, 학생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전제에 대해서는 직접 고민해 보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약자를 배려하는 것이 공동체(사회)를 지키는 최선의 길이며 최소의 노력이기 때문입니다. 약자라는 말에는 공동체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절대적 약자는 없습니다. 약자는 곧 사회적 약자입니다. 그러므로 약자를 배려하는 것은 곧 사회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약자가 배려받지 못할 때 사회는 붕괴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습니다. 약자로 태어나 약자로 죽습니다.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요?


물음에 대해 적절한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뻔한 이야기를 한 것 같기도 합니다. 남은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치열하게 사유하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가 원한 건 이런 보편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내게 어떤 답을 원했던 걸까? 어떤 확신을 가지고 싶었던 것일까? 궁금증이 더해가는 밤이다.



*첨부된 사진은 제주 함덕의 전이수갤러리 '걸어가는 늑대들'에서 찍은 사진임.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나를 소외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