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나물, 도라지나물, 시금치나물, 콩나물, 무나물 그리고 고추장과 참기름, 달걀프라이를 넣고 비빔밥을 만든다. 모두가 설날의 유산이다. 재밌게 만들고 맛있게 먹는다.
"저기 스님 한 그릇만 더 하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응답하라 1988>(2015)에서 나오는 '정봉이'의 대사다. 공부와 다이어트를 위해 절에 들어간 정봉이가 아침 공양을 할 때 산채비빔밥을 한 그릇 더 먹으려 스님에게 하는 말이다.
아이는 <응답하라 1988>을 좋아한다. 그중에서 정봉이를 제일 좋아한다. 아마도 제일 마음이 가는 인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건 나도 그렇다. 어찌 되었든.) 그래서인지 한 번씩 정봉이의 말을 따라 한다. 그럴 때마다 나 역시
"네, 한 그릇 더 하시고 성불하세요."
라고 답한다.
"그런데 율아, 성불이 무슨 뜻인지 알아?"
"스님들이 인사할 때 쓰는 말 아니에요? 성불하십시오."
"인사할 때 쓰는 말... 맞지."
"아싸!"
"근데 정봉이는 산채비빔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으니 성불하기는 어렵겠다."
"많이 먹으면 못해요?"
비빔밤을 두 그릇 째 먹다 말고 아이는 심각해진다. (대체 왜 심각해? 성불하려고? 좋아 보이는 건 다 하고 싶은 건가? 이게 뭘까 싶다.^^) 하긴 이미 두 그릇을 다 비워가는 참이니 물릴 방법도 없다.
요즘 들어 아이는 부쩍 식욕이 좋다. 무엇을 먹어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인가'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맛있게 먹는다. '맛있으면 0칼로리'라고 웃으며 참 많이도 먹는다. '성장기니까 괜찮아' 하면서도 나날이 살이 찌는 것 같아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아들, 그래도 걱정 마. 세상 모든 일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으니 언젠가 자연스럽게 균형이 맞춰지겠지.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폭식도 다이어트도^^.
정봉이는 심장병이 걸렸지만 복권에 당첨이 되었고, 7수를 했지만 훗날 택이보다 더 성공한 사람이 되었으니. 그러니까 우리 그렇게 믿자.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왜요?"
"성불은 원래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른다는 말인데."
"번뇌요?"
"번뇌는... 욕심 때문에 생기는 마음의 갈등이나 괴로움 같은 거."
"아-, 욕심 때문에 못하는 거구나."
"정봉이가 비빔밥 한 그릇 더 먹고 싶어서 슬쩍 눈치를 보잖아. 물론 아주 잠깐이지만."
"눈치 안 보고 욕심 부리면요?"
"당장은 괜찮겠지만 그 욕심이 다른 사람을 괴롭게 만들 거고 결국은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를 '예토'라고 부른다. 더러운 땅이라는 뜻이다. 현실세계가 더러운 것은 번뇌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고, 번뇌는 인간의 속된 욕망에서 비롯된다.
속된 욕망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욕망의 그림자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닐까 싶다. 욕심이 자기를 향하면 그 그림자는 다른 이들을 가릴 수밖에 없으니.
예토의 반대는 '정토'이다. 번뇌가 없는 깨끗하고 맑은 세계를 뜻한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을 때 예토는 정토가 된다. 이게 성불이다.
아들, 아빠는 어제 사리암이라는 암자에 다녀왔어. 937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작은 절이야. 아빠는 그곳에서 기도를 했어. 가만히 앉아 이런저런 바람을 이야기했어. 그런데 자꾸만 속된 욕심이 목소리를 내는 거야. 건강, 돈, 공부... 결국 아빠는 유혹에 넘어갔어.눈치를 보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우리 가족을 위해 기도를 했어.
기도를 마치고 다시 937개의 계단을 내려오며 내내 마음이불편했어.번뇌를 버려야 할 곳에서 번뇌를 쌓고 왔으니.율아, 아빠도 성불하기는 어렵겠다.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