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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비 Dec 17. 2023

오히려 좋아

모든 건 너의 물음에서 시작되었다_#63

#63 예순세 번째 밤_오히려 좋아


"아빠, 엄마한테 들으셨어요?"

"뭐 말이야?"


"어저께 본 오케스트라 오디션 결과 말이에요."

"아-, 들었어."


며칠 전 아이가 학교에서 운영하는 오케스트라의 오디션을 보겠다고 말했다.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원래 그런 아이니까. 늘 생각하지만, 나와 달리 욕심이 많다. 악기도 배우고, 그림도 그리고, 운동도 하고, 과학 실험이나 독서 모임에도 참가한다. 지난주까지는 펜싱을 배웠고, 이번 주에는 컴퓨터 자격증 시험을 친다.


신기한 건 배움에서 그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기 위해 시험이든 대회든 무언가 끊임없이 도전한다는 점이다. 실패하면 다시 도전해서 실패의 경험을 성공을 위한 과정으로 만든다. 결과가 중요하다는 사실도 그리고 그것이 또 다른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항상 시간에 쫓긴다는 점이다. 너무 바쁘다. 실패와 포기와 단념을 배우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열두 살의 삶이 저런 것인가 싶어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내심 아이가 오디션에서 떨어지기를 바랐다. 지금의 시간을 더 잘게 쪼개 쓰지는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시 도전하겠지만.


"괜찮아? 속상하지. 피아노 연습 많이 했는데... 많이 기대했잖아."

"네, 조금 속상해요."


"에구, 어쩌나. 기대가 컸으니 실망도 크겠지."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요.^-^"


"괜찮아, 안 괜찮아도. 속상한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는 않잖아."

"아-빠- (울먹울먹)."


아이의 '괜찮다'는 말에 나는 더 이상 속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 올라간 입꼬리가 아니라 처진 눈매에서 실망을 읽는다. 그러기를 바라기도 했고, 왠지 그럴 것 같기도 했지만 막상 아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썩 좋지는 않다. 오늘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까.


'열심히 노력했으면 그걸로 충분해'라고 말하며 노력의 가치를 말해 볼까? '포기하지 말고 다시 도전하면 되지'라고 말하며 도전의 중요성을 말해 볼까? 그것도 아니면...


"이런 말 어떨지 모르겠는데, 오디션에 떨어져서 아빠는 조금 좋다."

"왜요? 뭐가 좋아요?"


"너 지금도 너무 바빠. 이것저것 다 욕심부리다가 방전되면 어쩌려고."

"방전이요? 전기가 나간단 말이죠?"


"맞아. 휴대전화도 배터리가 나가버리면 완충하는 데 더 오래 걸리잖아. 사람도 마찬가지야. 에너지가 다 닳아버리면 더 오래 충전해야 해."

"사람은 어떻게 충전해요?"


"어쩌기는? 쉬어야지. 아빠도 몇 년 전에 방전된 적이 있는데..."

"알아요. 전에 말씀해 주셨어요. 아빠는 충전 다 됐어요?"


"아니. 아직도 충전 중이야. 한 번 방전된 배터리는 100% 충전하기가 어려워. 때로는 고장이 나기도 하고."

"그럼 어떻게 해요?"


"뭘 어째 어차피 결론은 하나잖아."

"뭔데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 불행한 것보다는 행복한 쪽으로, 괴로운 것보다는 즐거운 쪽으로 생각하는 거. 사람은 시간을 거스를 수 없으니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수밖에 없잖아. '오히려 좋아' 하면서.

"오히려 좋아."


"상황이 좋지 않아도 고민의 방향은 언제나 '오히려 좋아' 쪽을 향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율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뭘까?"


고민의 90%는 일어나지 않을 쓸데없는 고민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민과 걱정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마찬가지였다. 왜 방전이 되었는지를 고민했고, 어떻게 충전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지난 몇 년, 방전과 충전의 시간을 보내며 뒤늦게 깨달은 게 있다. 답이 없는 고민은 없다는 것, 답을 찾지 못한 건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후회 속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과거는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나는 이 말을 좋아한다. 지금 할 수 있는 선택지 중에서 답을 찾으면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아빠, 우리 안아요."

"그래 우리 아들 잘했어. 그리고 잘할 거야."


"충전 완료."

"아빠도 충전 완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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