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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비 Dec 30. 2023

인간의 자격

모든 건 너의 물음에서 시작되었다_#64

#예순네 번째 밤_인간의 자격


"아빠는 이번 크리스마스 때 무슨 선물 받고 싶으세요?"

"받고 싶은 건 많은데, 아마도 아빠는 못 받을 거야."


"왜요? 선물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알았어?"


"작년에도 똑같이 말씀하셨어요."

"그랬나? 근데 진짜야. 뭘 착한 일을 했어야지."


아들아, 농담이 아니란다. 아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그저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남았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힘겨웠단다. 올해는 유난히 더 그랬어.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 누군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대로니까. 겨울이 되니 더 후회가 된다. 부끄러움은 아빠의 몫이겠지.


"율이는 어때?"

"저는 카드 만들어서 크리스마스 트리에 걸어둘 거예요."


"좋겠다. 우리 아들은. 착한 일도 쓰고 바라는 것도 쓰고. 산타할아버지가 잘 알아볼 수 있게."

"아빠는요?"


"아빠는 양말도 걸지 않을 거야. 그럴 자격이 없어."

"그래도 작년에 받으셨잖아요."


"운이 좋았던 거야."

"운이요?"


"착한 사람 다 주고 남은 선물 받은 거야. 그래도 나쁜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그래도 나쁜 행동 하지 않으면 착한 거 아니에요?"


기억하니? 얼마 전 <서울의 봄>을 보고서 우리는 인간의 자격에 대해 이야기했잖아.  사람의 이름이 왜 전두광인지, 마지막 그의 웃음소리가 왜 악마의 웃음소리처럼 들렸는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자격이 무엇인지, 그리고 아름다운 인간의 자격은 무엇인지.


그때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자격이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름다운 인간의 자격이냐고 물었었잖아. 단순한 이분법이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야겠지.


물론 나쁜 일과 착한 일을 어떻게 구분할지를 따져 물을 수도 있을 거야. 의도와 결과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물을 수도 있을 거고. 사람에 따라 착함과 나쁨의 경계가 다르기도 하고, 때론 착한 의도가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하니까. 그래도 말이야.


자기 자신은 알지 않을까. 자기가 나쁜 일을 하는지 착한 일을 하는지 말이야. 산타할아버지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알고 계시는 것처럼.


"길거리에 휴지를 버리지 않았다고 해서 착한 행동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나쁜 행동은 아니겠지만."

"그럼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건 나쁜 행동이고,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 건 그냥 행동이고, 길거리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건 착한 행동인 거예요?"


"그렇겠지."

"근데 아빠,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대' 그러잖아요."


"그런데."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신다는 말은 울지 않으면 선물을 주신다는 말이잖아요. 웃겨달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러면 나쁜 행동을 하지만 않아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가... 하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게 크리스마스 트리에 양말을 걸 최소한의 자격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아빠도 기대해 볼까."

"그럼 아빠도 같이 카드 만들어요."


"고마워 아들."


아들아, '아름답다'는 '나답다'는 말이란다. 그리고 '나답다'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다는 뜻이겠지. 우리는 자신의 선한 마음을 속이고 악한 행동을 하곤 하잖아. 그러니까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속이지 않아야 하는 거야. 아빠는 너무 늦게 알았어.


아내가 지나가다 한 마디 던진다.

 "크리스마스 이야긴데 너무 어둡지 않아."


좀 그런가?

모두의 양말 속에 선물이 가득하기를 기도하는 밤이다.


2023년 12월 24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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