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크슛
모든 건 너의 물음에서 시작되었다_#68
#예순여덟 번째 밤_덩크슛
아침, 아들과 함께 <덩크슛>을 들으며 출근을 한다. 아들은 '엔씨티 드림'의 <덩크슛>을, 나는 '이승환'의 <덩크슛>을 선곡한다.
'덩크슛 한 번 할 수 있다면 내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율아, 율이에게 '덩크슛'은 뭐야?"
"덩크슛이요?"
"그러니까 이승환 아저씨가 '예쁜 여자 친구와 빨간 차도 갖고 싶었지만 그보다 원했던 것은 그 누구도 모를 거야. 덩크슛 한 번 할 수 있다면' 그러잖아. 율이는 그런 거 없어?"
"그런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꿈같은 거예요?"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그러니까 사람이나 돈처럼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지만."
"가지고 싶은 거요?"
"그것도 맞는데,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사소한 일이지만 누군가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기 어려운 거. 그래도 한 번쯤은 꼭 이루고 싶은 그런 거?"
"꼭 수수께끼 같네요."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알지 못했다. 아이가 왜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그리고 이 질문이 애초에 잘못된 질문이라는 사실도. 생각해 보면 '덩크슛'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내적인 결핍에서 비롯된 욕망이다. 결핍을 마주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다행스럽게도 이 아이에게는 결핍이 없구나. 결핍이 없으니 욕망도 없는 것이구나.'
"<무민과 위대한 수영>인가? 무민 이야기 중에 무민 친구가 벌에 쫓겨서 물에 들어가는 이야기 있잖아?"
"네, 알아요. 수르쿠요."
"맞다, 수르쿠. 거기에서 수르쿠는 무민이나 꼬마 미처럼 수영을 하고 싶어 하지만 물을 무서워하잖아. 그런 거 아닐까. 수르쿠에게는 수영이 '덩크슛'이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이승환 아저씨가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네.^^"
토베 얀손의 <무민과 위대한 수영>(2011, 작가정신)에서 무민의 친구 수르쿠는 물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물을 무서워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아무래도 난 안 돼. 난 왜 항상 내가 할 수 없는 것만 원하는지 모르겠어.'
"아, 그런 거요. 저는 그런 거 없는데. 아빠는 그런 게 있었어요?"
"있었어요? 아빠는 지금도 있어."
"있어요?"
거짓말이다. 아니, 거짓말이었다. 아이에게 자신 있게 답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줄 알았다. 내게도 인생의 덩크슛이 있다고, 있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든 게 '돈'이다.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 옆에서 시간과 싸우며 부지런히 생각을 더듬는다.
"율아, 아빠도 막상 하나만 고르려고 하니까 잘 모르겠어."
"아빠는 항상 여행 가고 싶다 하시잖아요."
"여행도 좋은데, 여행은 시간과 돈 때문이라서 덩크슛과는 좀 다른 거 같아서."
"저는 이번에 하는 과학전람회 잘하고 싶어요. 잘해서 좋은 상 받고 싶어요."
"왜 그러고 싶어?"
"상 받으면 기분 좋으니까요."
"그래, 서율이는 잘할 거야."
아이는 정직하다. 이루고 싶은 게, 가지고 싶은 게 언제나 뚜렷하다. 나는 이 선명함이 너무 부럽다.
과정의 고통을, 실패의 두려움을, 성공의 대가를 먼저 떠올리는 나와 달리 나아가는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다. 그때그때의 욕망에 충실하다. 거기에는 결핍의 흔적이 없다.
그래, 덩크슛의 의미 따위가 뭐 그리 중요할까. 너에게는 지금이 인생의 전부일 테니.
"아빠는 말이야. 피아노. 어려운 피아노곡 한 번 쳐보고 싶어."
"정말요?"
"정말. 아빠는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참 멋있더라. 아빠도 피아노 한 번 쳐보고 싶어."
나는 한 번도 피아노를 쳐본 적이 없다. 어릴 적 나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 손에 이끌려 간 곳은 태권도 도장이었다. 태권도도 나름 재미있기는 했지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일까 피아노는 삶을 살아내면서 문득, 문득 떠오르는 결핍의 흔적이었다.
"아빠, 저랑 같이 배워요."
"그래, 그러자. 언젠가 꼭."
"아빠, 태워주셔서 고맙습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아드님, 잘 다녀오세요. 저녁에 봐요."
아이를 통해 나의 내면에 각인된 결핍의 흔적을 지워간다. 낯 뜨거운 말이지만, 어쩌면 이 녀석이 내 인생의 '덩크슛'일지도 모르겠다. 이 녀석과 함께 짜릿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