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의 즐거움_#9
#9 빛은 흔적이다
"아빠, 여기 길이 참 예뻐요. 꽃도 있고, 나무도 많고."
"그래, 참 좋다."
"아빠는 어릴 때 어디에서 살았어요?"
"경주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살았어. 산도 있고, 논도 있고, 밭도 있고, 목장도 있고, 시냇가도 있는 그런 마을."
"지난번에 경주에 갔을 때 지나가면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기억나니? 길을 못 찾아서 한참 헤맸는데 …"
"기억은 나는데, 모습은 잘 생각나지 않아요."
"어차피 옛 모습은 거의 다 사라져 버렸어. 조금 남아 있기는 했는데 그것도 다르게 보이더라.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말이야. 이제는 아빠의 기억 속에서만 반짝이겠지. 과거의 모습이 빛으로 사라져 버렸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반짝이는 빛 말이에요?"
"그래, 빛. 모든 건 빛으로 사라지니까."
"빛으로 사라져요?"
"그럼. 빛은 사라져 간 모든 존재들의 흔적이야."
"그래도 저는 빛보다 길이 더 좋아요. 숲도 나무도 꽃도 곤충도."
"그게 빛이 아름다운 이유인 걸."
"언젠가는 이 나무도, 여기 숲도 다 사라지겠죠. 지구환경에 관한 책에서 읽었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괜찮아.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빛으로 남으니까."
"아빠는 네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뿐만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는 것들을, 이제 빛으로 남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면 좋겠어."
"아들, 빛으로 사라지기 전에 언젠가 이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
"네, 꼭 다시 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