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래비티》와 화학 결합
영화 《그래비티》주인공 라이언은 어린 딸을 잃고 세상에 미련이 없다. 세상의 모든 연(緣)을 버리고 우주로 떠나올 만큼 이 모든 슬픔이 라이언을 고립시켰다. 우주에 와서 어떤 점이 가장 좋냐는 코왈스키의 말에 ‘고요함 (Silence)’이라고 답한다. 사랑했던 것들을 이렇게 허무하게 잃을 수 있는데, 인연을 맺어 무엇할까. 인연이 하나둘 나에게서 떠나가게 된다면, 그래서 내가 계속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한다면, 차라리 오롯이 혼자가 되어 더 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희망이 없어져 바닥까지 다다른 좌절에서 오는 다짐이었으리라.
자연에서 발견되는 물질들은 대개 분자 혹은 일정 비율의 결정으로 존재한다. 이들은 화학 결합하며 가장 안정한 상태를 찾아간다. 물론 원자 홀로 안정한 18족 원소와 같은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18족 원소처럼 가장 바깥 껍질의 원자가 전자가 모두 채워져 안정함을 찾고자 결합한다. 아마 라이언에게 딸과의 관계는 이렇게 안정함을 주는 안식처였을 것이다. 딸을 잃고 혼자가 된 라이언은 다시는 사람과의 인연을 맺지 않기 위해 우주에 나왔지만, 불안정했을 것이다. 딸과의 행복했던 기억보다 그녀에게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녀가 그렇게 바라던 고요함은 폭발한 인공위성의 잔해가 라이언이 있던 우주 정거장을 덮친 뒤부터 ‘두려움’이 된다. 그곳에 있던 사람 중 결국 라이언과 코왈스키만 살아남았지만, 코왈스키마저도 결국 라이언을 살리며 우주 멀리 사라진다. 비로소 라이언은 대중 속의 혼자가 아닌 말 그대로의 혼자가 된다. 라이언은 그동안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혹시 모를 가능성을 생각하여 살아남고자 노력했지만, 우주선이 마음대로 작동하지 않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을 각오로 산소를 잠근다. 그때 등장한 코왈스키의 환영이 라이언에게 이렇게 말한다.
I get it, it's nice up here. You could just shut down all the systems, turn down all the lights, just close your eyes and tune out everyone. There's nobody up here that can hurt you. It's safe. What's the point of going on? What's the point of living? Your kid died, it doesn't get any rougher than that. It's still a matter of what you do now. If you decide to go then you just gotta get on with it. Sit back, enjoy the ride, you gotta plant both your feet on the ground and start living life. Hey, Ryan, it's time to go home.
"이해해, 여기 얼마나 좋아. 그냥 전원도 꺼버리고, 불도 다 꺼버리고, 그냥 눈을 감고 세상 모두를 잊어버리면 되니까. 당신을 상처 입힐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안전하다고. 계속 가야만 하는 이유가 뭔데? 계속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뭐 있냐고? 당신 애가 죽었어, 그것보다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거야. 하지만 여전히 모든 건 당신이 지금 뭘 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어. 만약 계속해서 살기로 결정했다면 그냥 가보는 거야. 자리에 앉아서 즐겨, 이 땅에 당신 두 발을 묻고 삶을 살아가는 거야. 이봐, 라이언.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야. “
살아서 내 두 발을 땅에 묻고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마 사람 사이에서 상처받을 것을 각오하고 인연을 받아들이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작용하는 인력 즉 영화의 제목처럼 ‘그래비티’에 기꺼이 이끌리는 것을 이야기하는 걸지도 모른다.
화합물이 화학 결합을 할 때도 인력이 작용한다. 이온 결합을 예시로 들면, 양이온과 음이온이 점차 가까워지며 작용하는 인력과 반발력에 의해 전체 에너지의 합이 결정된다. 인력과 반발력이 모두 작용하지 않는 시점의 에너지를 0으로 설정하고 두 이온 사이의 거리가 점차 가까워지면, 각 이온 내부의 원자핵과 전자도 가까워지며 인력과 반발력이 동시에 작용한다. 일정 거리까지는 이온 간 거리가 줄어들며 인력으로 인한 에너지 변화가 더 커 안정해지는 효과를 보인다. 그러다 전체 에너지가 가장 낮아지면, 더 좁은 거리에서는 반발력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해당 거리를 계속해서 유지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결합의 실체다.
라이언에게 딸을 잃은 슬픔은 저 정전기적 인력에 의해 안정해진 결합을 뜯어내는 엄청난 크기의 외력을 받아내는 일과 같았을 것이다. 충격을 받은 사람에게 다시 안정한 결합을 찾는 것조차 지치는 일이었을 테니.
그녀가 지구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방법을 찾아 나섰을 때,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우주에서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 지구와의 통신을 시도한다. 그러다 라디오 통신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저 지구에 있음을 확인하며 희망의 불씨를 잡는다. 비록 통신이 된 ‘아닌강’은 이누이트족 어부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강아지와 아기 울음소리를 들려준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지구에서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관계에서 오는 기쁨을 라이언에게 다시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에 용기를 얻은 라이언은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여 엄청난 열과 빛을 내는 과정을 거치더라도, 힘껏 지구 중력에 붙잡힌다. 물에 빠진 우주선에서 겨우 탈출해 나와 두 발로 대지에 서는 장면에서 느껴지는 비장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인력에서 벗어났던 사람이 다시 인력에 매이면 그 힘이 얼마나 크게 느껴질까?
‘결합’이라는 것은 그렇게 비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화합물이 너무 당연하게 우리 주변에 존재하기 때문에, 많고 많은 원자들 중에 하필 서로에게 이끌려 분자를 이뤘다는 것이 얼마나 낮은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상상하기 어렵다. 결합은 기적과 같은 일이며 그렇게 만들어진 안정함은 맞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서로 충돌하며 상처 입은 과거들 때문에 다시는 관계 맺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스스로 고독하게 만들고 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화합물들을 바라보라. 우리 또한 혼자 살 수 없다.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외력에 두려워 말고, 그저 그 기쁨과 안정감을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