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당하는 존재의 변화

영화《트루먼 쇼》와 관찰자 효과

by 엠삼

<2017년 6월 12일 오후 3시 17분>


물음 하나.

스스로가 부여한 책무를 타인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타인에게 평가된 순간에도 그것은 여전히 스스로가 부여한 책무인가?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감히 잘못을 따질 수 없나?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유인가 주어진 문화의 시스템인가?

나의 인생은 오롯이 내 것일 수는 없나?

누군가에게 예속된 장식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나?

종속되지 않고 함께할 수는 없는 것인가?


물음 둘.

나 스스로 책무를 잘 부여하고 있는가?

나는 타인에게서 종속되어 살기를 거부하는 동시에

그것에서만 벗어나려는 목적만을 가지고 살지 않는가?

타인은 그리하여 과연 나의 기준인가?

내 생각이 타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가?

앞의 물음이 참이라면, 나는 생각을 가려야 하는가?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말할 수 없는가?

이 물음에 답하면서도 여전히 나는 타인에게 종속되길 자처하는가?


물음 셋.

나는 무엇이 두려운가?

여전히 도피하고 싶고 마주하기 어려운가?

나와 다른 생각의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가?

동시에 2개의 다른 생각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가?

2개 모두 답의 후보군이 될 수 없는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정답은 진실로 정답인가?

사람이 말한 것 중에 정답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정답은 진실과 동등관계에 있을 수 있는가?


물음 마지막.

사람은 모두 자신이 옳기를 바라는가?

다른 사람이 틀려야만 자신이 옳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세상은 옳고 그른 것을 쟁취하는 싸움으로 가득한가?


이 글을 쓴 시점에 적잖이 화가 났던 모양이다. 이를 꽉 물고 꾹꾹 눌러쓴 느낌이 든다. 2017년 6월 12일 오후 3시 17분이라는 이 글의 제목을 아무리 봐도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타인의 기준과 시선에서 벗어나 제발 내 방식대로 살고 싶다는 울부짖음이 들리는 건 확실하다. 그래. 그때와 이 글을 쓰는 지금의 나는 좀 달라졌나. 이제 타인의 기준과 나는 상관관계가 없는 완전한 독립을 이뤘나?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었다. 여태까지의 삶을 총평하자면 그다지 착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내면에는 언제나 타인의 마음에 들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착한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니까. 누구나 나를 좋아하면 갈등이 없을 테니까. 물론 태어나기를 고슴도치로 태어나서 본성이 까칠한지라 무심코 상대를 상처 입히는 일들이 있었지만, 대놓고 까칠한 본성으로 살지는 않았다. 사회화되면서 축적해 온 데이터를 통해 ‘착한 사람’이 할법한 행동들을 마치 시뮬레이션 게임의 선택지를 고르듯 택해 행했다.

이 콤플렉스가 발목을 잡기 시작한 시점은 데이터의 표본이 적당히 커져 그 데이터의 해석들이 신뢰도를 가지기 시작한 순간부터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평가하는 험담에 청자가 될 때마다, 나의 행동을 반추하고 행동 지침을 수정했다. 그렇게 거절하지 못하는 호구 대학생이 되었다. 거절하면 사람들 험담에서 내 이야기가 등장해 평판이 나빠질까 노심초사했다. 순간순간이 자기 검열이었다. 아예 타인이란 존재가 나의 기준이 되어버려 결국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까지 도달했다. 타인은 본격적으로 잣대를 들이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다수의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이 사실이 이런 우리에게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오히려 발생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을 상상해 보기로 한다. 정말로 전 세계 사람들이 내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낸다면 어떨까? 영화 《트루먼 쇼》에서는 탄생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관찰당한 남자, 트루먼이 등장한다. 삶이 TV 프로그램으로 방영되고 있는지도 몰랐으며, 심지어 그런 삶이 전 세계에 생중계된다. 이런 삶이라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이라 봐도 무방하다.

실시간으로 방영되고 있는 트루먼의 하루

영화 《트루먼 쇼》 속 프로그램 제작진들은 이 관찰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위해, 트루먼이 세트장을 벗어날 수 없게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탐구심이 강하게 자란 트루먼에게 비행기 공포를 심고, 아버지가 폭풍우로 목숨을 잃게 되는 장면을 연출하여 물 공포증을 심어 세트장인 ‘섬’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가 제작진에게,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관찰되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은 없었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인한 제한이 이렇게 큰 힘으로 작용한다면 꽤 두려워할 만하다.


과학에서도 관찰 행위가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다. 바로 ‘관찰자 효과(obsever effect)’이다. 관찰하는 행위가 현재 시점에서 관찰되는 계를 교란하는 것이다. 관찰하는 행위를 자세히 살펴보자.

콤프턴 산란 효과

광원에서 나온 광자가 물체에 충돌하는 과정과 그 후 그 광자가 눈에 도달하는 과정이 있어야 물체를 관찰할 수 있다. 빛이 물체에 부딪혀 반사되지 않고는 물체를 볼 수 없다. 따라서 물체와 광자 사이에 충돌이란 변화는 관찰 과정에서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관찰하고자 하는 대상의 질량과 규모가 유의미하게 작은 입자라면, 관측이 이뤄진 시점에 해당 입자는 이미 관측된 곳에 없다. 운동량 보존 법칙에 의해 광자-전자 간 비탄성 운동 속에서 정지되어 있던 전자의 운동량이 발생하여, 눈으로 광자가 도달하는 시간 동안 다른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즉, 관측에 의해 의도하지 않았던 운동이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대상은 관찰을 통해 여전히 변화를 경험하지만, 그 효과가 매우 작다면 종종 무시할 수 있다. 관찰자 효과에 의한 영향을 무시할 수 있는 상황은 언제일까? 바로 광자가 충돌해도 질량이 상대적으로 매우 커 운동량이 미세하게 변해도 대상의 속도 변화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다.


영화 속 트루먼도 질량을 키워 관찰에 대응한다. 바로 자아의 질량이다. (자아라고 적었지만, 그 개념은 Ego보다 Self염두에 두었다.) 자신의 삶을 누군가 관찰하고 있으며 삶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트루먼은 더 이상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고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결국 그들이 만들어 낸 ‘물 공포증’을 이겨내고 배를 타고 세트장 밖으로 나간다. 타인의 관찰이나 시선이 만든 개입이 자신의 자아에 비해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를 깨달으면, 그런 것들은 이제 나에게 변화를 일으켜도 흔들지 못한다.


비록 지금은 담임교사가 아니지만, 과거 학급 담임을 맡으면 주로 여학생만 있는 반을 맡았다. 보통 청소년기는 주변의 시선에 민감한 시기기 때문에, 보이는 모든 것, 특히 외적 모습에 무척 신경 쓴다. 이는 색조가 진한 화장이나, 필터를 사용해 보정된 얼굴이나 얼굴의 일부분을 가린 사진만을 SNS에 올리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런 아이들의 자존감 증진을 위해, 자신을 검열할 때마다 이 말을 따라 하게 했다.

‘어쩌라고’

(사실은 이 뒤에 ‘너나 잘해’라는 말도 보통 붙이나, 여덟 글자가 같이 있으면 너무 나빠 보인다고 생각하는지 아이들도 뒤에까지는 잘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걸 시키게 된 계기는 현재 일하고 있는 학교에 처음 와 맡았던 학급 친구와의 대화 때문이다. 한 번은 학생이 씩씩거리면서 속상함을 마구 토로한 적이 있었다. 어떤 남학생이 지나가다가 그 학생과 주변 친구들의 생김새를 평가했던 모양이다. 그 학생더러 그런 말을 다시는 하지 않게 혼을 내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물었다.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어?’ 그런 말에 대응할 필요가 뭐가 있냐는 말로 얼버무리긴 했지만, 학생은 그 평가를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속상했고, 다음번에는 평가 자체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도록 교사에게 그 요소를 제거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타인의 시선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접근을 달리해야 한다. 타인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 않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뭐가 있을까? 앞서 말했듯 질량이 압도적으로 큰 물체에 자그만 광자의 충돌은 무시할 만하다. 이처럼 내 자아를 묵직하게 키워, 날아오는 상대의 평가 같은 변화에 대응하면 된다. 그게 바로 ‘어쩌라고’가 가진 힘이다.

‘만약 그 아이가 다음에도 그렇게 이야기하면, 어쩌라고 딱 네 글자만 말해. 네가 지을 표정은 딱 외모 평가를 네가 할 수 있는 처지인가를 진심으로 고민하는 표정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더해주면 돼. 고민을 해보고 내가 그 평가를 받아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다면, 발화자가 아무리 잘생긴 사람이라도 똑같이 하면 돼.’


레오제이의 유행어

자기 검열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하는 가스 라이팅이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너 혹시 뭐 돼?’,‘이걸 끼고 일해야 능률이 올라갑니다.’와 같은 밈들이 유행했던 것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타인과 심지어 자신에게도 관찰당하며 영향을 받지만, 그것을 자신의 존재와 연관 짓지 않고 분리하는 자신만의 내공이 묵직해진다면, 그 변화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나뿐만 아니라, 나를 지나쳐 가는 학생들이 자유롭길. 한 번뿐인 인생, 그대들의 방식대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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