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렵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하나 있다. 요즘 오토바이에 푹 빠져 사는 친구인데 뒤에 태워주겠다며 연락하여 만나게 되었다. 그날 나는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를 체험할 것이라 상상하지 못한 채 준비되지 못한 공포로 겨울에 얼어붙은 다람쥐처럼 떨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도 어렸을 때 배우지 못해 여전히 자전거를 타는 것을 하지 않는다. 늦게나마 배웠지만 딱히 자전거를 탈일도 없고 혼자서 타기에는 자전거 운전(?) 능력이 창피할 수준이기 때문이다. 자전거는 물론 그 흔한 대여용 킥보드조차 나는 두려워하고 있다. 회사에 지각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도 나는 옆에 있는 킥보드를 무시한 채 내 달리기 실력에 의존한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이 태워주는 자동차를 타도 멀미에 시달리는 일이 잦았고 버스를 적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내 다리로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은 나에게는 두려움이다. 유일하게 두렵지 않은 교통수단은 지하철인데 신기하게도 아무렇지 않게 타는 것이 다른 교통수단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다. 지금은 버스와 지하철은 아무 두려움 없이 내 다리처럼 이용하는 이동수단일 뿐이다.
나는 차와 자전거를 스스로 움직이지 못해 누군가가 태워주는 것을 제외하면 탑승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만드는 기회로 택시가 있지만 요금이 비싼 탓에 대부분은 지하철을 이용한다. 하지만 지하철 운행시간이 아니면 택시를 타야 하기에 누군가가 태워주는 건 안전하다는 것을 수많은 택시를 타면서 경험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태워주는 건 전혀 두렵지 않아 오토바이도 충분히 탈것이라 생각했다. 오토바이를 타는 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 건 스쿠터뒤에 타본 경험도 존재해서 그때 잠시 두려움이 있었지만 도착지까지 가는 것은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토바이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한 내 착각이다.
친구의 오토바이는 0-100이 3초대가 나오는 미친 가속력을 가진 마니아용 오토바이다. 평소에 200킬로를 훨씬 넘는 속도를 영상으로 자랑하며 세상을 재미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친구다. 그런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같이 바다를 구경하기 위해 약속을 했다. 그가 태워주는 오토바이를 경험하고 싶기도 했다. 나는 스쿠터도 뒤에 타봤으니까 말이다. 스쿠터를 경험해 본 나로서는 그냥 뒤에 앉으면 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앉아 속도감이 어떤 것인지 체험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도 반갑고 속도를 체험하는 기회도 나에게는 찾아오기 힘들기 때문에 너무 설레면서 두려운 게 같이 찾아왔다.
그렇게 약속장소에서 만난 뒤 출발하는 순간 나는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깨어있었던 피곤한 직장인은 순간 전쟁터에서 전우가 총에 맞는 모습을 본 군인의 상태에 도달했다. 살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제로백 3초대를 만드는 미친 가속력이 주는 엄청난 에너지와 내가 직접 운전하지 않아 언제 달려갈 것이라 예상하지 못하는 두려움을 안전장치라고는 헬멧뿐인 그 뒷좌석에서 온전하게 감당해야 했다.
살려달라 애원하며 5분 만에 주행을 멈췄다. 내리는 순간 비 오는 날 홍수를 피해 어렵게 바위에 올라간 다람쥐처럼 온몸을 떨며 두려워했다. 모든 피곤함과 고통은 전부 사라지고 온전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 상태가 되는것을 경험한 나는 인생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일중 하나로 기억하기로 했다.
경험한 두려움은 인생에서 얻기 힘든 감정이었다. 앞으로 살면서 두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해 나갈 것인가 오랜 시간 고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두려움을 그대로 인정하고 단계별로 두려움을 해소해 가면서 결국엔 그 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나는 친구와 이 두려움을 이야기하며 자전거부터 다시 직접 운전해서 두려움을 해소해서 언젠가는 같이 오토바이를 타고자 약속하고 해어졌다.
그렇게 헬멧을 든 채 버스를 타서 집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