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고 나누자, 나누려면 넘치자
나: 도무지 그 무엇도 궁금해하지 않는 내가, 너를 궁금해하겠다(?).
너: 오호라..
나: 딱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감정보다 더 넘치게 느끼는 감정이 있잖아. 나만의 이론에 따르면.. 더 넘치게 느끼는 무언가를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을 것 같거든.
너: 그렇지. 한 팝가수가 최고 위치에서 상을 많이 받은 해에 그걸 함께 기뻐하며 나눌 친구가 없다는 걸 깨닫고 슬펐다고 들었어.
나: 그런 거지. 우리가 이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우리는 서로의 넘치는 감정을 나눴던 적이 없던 거 같더라? 그래서 묻는다. 네게 슬픔이란 뭐야?
너: 갑자기?
나: 슬펐던 경험이어도 되고, 네가 어떤 포인트에서 슬프다는 감정을 느끼는지 얘기해 줘도 되고.
너: 슬픔이라.. 생각해 보자. 우는 걸 얘기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나 툭 치면 우는데! 티브이 채널 바꾸다가 누가 울고 있으면 일단 따라 우는데 그건 반사작용(?)이지 슬픔의 감정 때문인 건 아니지.
나: 너 우리 언니..??
너: 그동안 나도 동생이 많이 달래줬다. 움.. 그러고 보니 슬픔이 뭘까. 맛집 갔는데 자리가 없어서 슬퍼, 영화 벌써 내려가서 슬퍼, 그렇게 슬프다는 말을 평소에 꽤 자주 쓰는데 그건 넘치는 감정의 슬픔인 건 아니지. 너는 언제 슬픈데?
나: 얼마 전에 지인들이랑 슬픈 영화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다들 그 포인트가 많이 다르더라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구할 수 없는 무력감을 얘기했고 나는 어떻게 해도 어긋나는 상황이 슬프다고 말했어. 파수꾼이나 우리들을 예시로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또 슬퍼. 나한테는 이게 슬픔 같아.
너: 내가 요즘 스우파를 보잖아. 경쟁 프로그램이라서 배틀에서 지면 그다음부터는 나올 수 없거든. 다들 몰입해서 열심히 하는 걸 보는데 떨어지는 상황이 정말 안타까워. 당장 생각나는 건 요즘은 그게 슬퍼. 그렇다고 그게.. 막 프로그램 끝나고도 잔감정이 남아서 휘몰아치고 그 정도는 아니긴 해. 야, 슬픔 뭔데 나 이거 왜 몰라?
나: ㅎㅎㅎ 그럼 속상한 거 얘기해 보자.
너: 그건 좀 더 일상 속에서 자주 느끼는 감정이라 말할 수 있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야 말 때 속상해.
나: 다른 가족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일 때 속상해?
너: 정도의 차이지만 속상해. 조금 속상하다, 속상하다, 많이 속상하다 이렇게 여러 단계로 나눌 수는 있는데 결국 속상하다 카테고리 안에 있는 듯. 어디까지 속상하면 그게 슬픈 걸까 그건 잘 모르겠네? 너는 언제 속상해?
나: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 그동안 잘 못한 게 미안하고 속상했던 거 같아.
너: 헐, 그게 슬픔이 아니야?
나: 슬펐지. 내가 여전히 죽음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 같은데.. 순간 격하게 엉엉 울었지만 슬픔이었던 걸까, 잘 모르겠어. 그니까 슬픈 건 맞지만 슬픔인 건지는 모르겠달까. 무슨 말이냐.
너: 내가 말한 속상함과 너의 속상함에 간극이 너무 커서 당황스럽다 야.
나: 그러게, 우리가 같은 감정을 얘기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재미있다. 그러면 벅차거나 즐겁거나 기쁜 거 얘기해 보자.
너: 요즘은 집일에 빠져있고 아주 재미있어.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거 같아. 가족 중 나만 하는 거 보면 나만 재미있는 거 같긴 한데 암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고 있지. 이건 재미있는 일이고.. 야 벅차다.. 는 우리 같은 일반인(?)이 느끼는 거 맞아?
나: 생각해봐 봐.
너: 홈.. 여행 가서 예상하지 못한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어. 가끔 시각적인 이미지에서 어느 순간 내가 사라지고 이미지로만 꽉 찬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건 황홀함인가?
나: 오, 그렇구나. 벅차다는 감정이 뭔지 나도 잘 모르겠어. 막 기쁨이 흘러넘쳐서 나누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태.. 그런 걸까. 어떤 사람이 고아원에서 생활할 때, 운동회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너무 행복했대. 그래서 수녀님들에게 '제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일 거예요' 그렇게 말했던 기억을 인터넷에 올렸거든. 지금 돌아보니 그때의 마음이 짠하겠지만 그 아이는 정말로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던 거 같아. 찐 벅찬 감정이었던 듯하고 좋은 경험이었을 거야. 나도 그런 적이 있었을 텐데 기억이 안 나네? 입사, 입학 그럴 때는 신났어?
너: 아! 퇴사할 때- 정말 말 그대로 손을 들어 올리면서 앗싸!라고 외친 적이 있어! 그때 그 회사는 너무 떠나고 싶었었나 봐. 입사는 기쁘긴 했지만 퇴사가 더 신났던 기억이네 헤헤. 너는 어때?
나: 아! 내가 최근 오픈채팅방 몇 군데에 들어갔는데.. 수능 과목에서 궁금한 거 물어보면 답해주는 방이거든. 나 답해주는 걸 좋아하더라?
너: 아, 그거 알 것 같아. 어려운 거 오래 끙끙대다 결국 푸는 느낌 나도 좋아해.. 했어.
나: 오픈방에서의 나는 누군가가 궁금해하는 걸 적시에 해소해 주는 데에서 재미를 느껴. 남들은 못 풀고 나는 푸는 문제라는 건.. 이제 없고, 문제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고 너무 어려워서 못 푸는 게 훨씬 많아. 그래서 문제 자체에 흥미보다, 그냥 질문에 답하는 재미가 더 큰 거 같음.
너: 오, 지식인이 여기 있었네.
나: 그건 포인트라도 쌓이지, 이건 대답하고 끝이야. 고맙다는 인사를 항상 받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도 내가 좋아하더라고! 시간을 때우는 용도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들여서 할 만큼 좋아해. 그리고 나처럼 그 방에 대답하러 있는 사람들이 꽤 돼.
너: 오, 재미있네.
나: 그리고 너무 잘 맞는 사람이랑 춤을 춘 적이 있는데 그 순간은 아직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행복했어. 하지만 얼굴을 볼 필요가 없던 춤이라(읭) 누군지 전혀 모르겠고 그때도 몰랐음. 아, 학생들이 소식을 전해줄 때도 기뻐.
너: 오 너를 기억해서일까?
나: 나를 기억해서 기쁜 건 아닌 거 같은데.. 그건 기쁨보다는 반가움인가 그러면?
너: 감정을 기억해 내는 게 이렇게 어렵네. 감정을 잘 안 부르다 보니 많은 경험이 없는 게 되어버리고 내가 자주 부르는 것들만 남는 거 같기도 해. 자꾸 좋고 싫고 속상해~
나: ㅎㅎㅎ 그러게, 재밌네. 자꾸 얘기하고 이름을 불러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