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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탐구생활

다다익선, 진짜일까

크다는 건 넓고 무거워

by 오월

크다는 것은 언제나 양면의 얼굴을 가집니다. 크다는 말을 들으면 성장과 발전이 떠오르고, 넓어진다는 것은 곧 자유의 공간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크다는 것은 단순히 확장되는 일이 아니라 감당해야 할 무게가 늘어나는 일이며, 그 안에는 언제나 불확실성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크다는 건 내가 미처 닿지 못한 영역까지 책임이 스며드는 일이고, 그 크기를 감각하지 못할 때 우리는 쉽게 균형을 잃습니다. 그래서 크다는 말에는 기대와 함께 본능적인 경계심이 깃들어 있습니다.


얼마 전 지인이 제게 “오월 씨는 은퇴 계획이 있어요?”라고 물었어요. 어느 정도 정기수익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지금의 소비와 비교하며 구체적으로 해본 적이 있지만 은퇴 후 ‘무엇을, 어떻게, 왜’ 하고 싶은지 묻는 질문 앞에서는 매번 머리가 멍해집니다. 제가 우물쭈물하자 같은 테이블에 있던 한 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헐, 이번 주말에 뭐 할지 생각하는 건 쉬운데요!” 순간 머리가 띵했어요. 그 말은 며칠이 지나도 잊히지 않았습니다.


주말 계획을 세우는 일은 간단해요. 선택지는 명확하고 시간의 단위가 작으니, 날씨나 기분, 약속 하나만으로도 계획의 방향이 정해지죠. 그러나 은퇴 후의 삶을 계획하는 일은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단순히 여가를 어떻게 보낼지를 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낼 것인가를 묻는 일이니까요. 주말은 짧은 시간의 배열이지만, 은퇴 이후는 시간의 구조 자체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내 방의 용도는 명확하지만, 누군가가 운동장만 한 공간을 선물한다면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거에요. 이번 달 예산은 꼼꼼히 관리할 수 있지만, 앞으로 얼마를 벌고 싶냐는 질문 앞에서는 침묵하게 됩니다. 이렇게 기회가 많은 사회 속에서 여전히 '앞으로 뭐 할래'에 대답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은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을 것도 같아요. 작은 계획은 감정으로도 세울 수 있지만 큰 계획은 판단과 인식으로 해야 하니 어렵습니다. 미래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길이가 어디까지 인지 모르겠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크다, 많다, 무한하다’는 말은 더 이상 긍정적인 단어로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크기’라는 감각을 잃어버린 세대인지도 모르겠어요. 하루의 목표, 한 달의 성과, 분 단위의 영상처럼 모든 것이 작고 빠르게 잘려 있고, 언제나 ‘더 효율적으로, 더 생산적으로’ 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작게 나누면 편하고, 관리가 가능하고, 실패의 부담이 줄어듭니다. 하지만 삶의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크고 느리며, 쉽게 관리되지 않아요. 사랑, 일, 관계, 신념 같은 것들은 작게 쪼갤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오래 머물러야 비로소 형태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크다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능력이기도 해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불편함을 견디는 시간 동안 우리는 비로소 ‘크다, 많다’의 질감을 배울지도 모르겠어요.


개인을 넘어 생각하기 시작하면 크기라는 개념은 새로운 깊이를 갖습니다. 내가 하는 일 하나, 내가 쓰는 말 한마디가 관계의 안정이나 지속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크기는 단순한 넓이가 아니라 관계의 밀도가 됩니다. 크다는 것은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깊이 연결되어 서로의 무게를 나누는 것’ 일지도 모르겠어요.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더 무거워지기도, 더 가벼워지기도 할 겁니다. 나의 작은 선택이 누군가의 생에 영향을 일으키는 순간, 크기의 의미는 확장됩니다. 크다는 것은 결국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에요. 관계가 늘어날수록 크기도 커지고, 책임도 커집니다.


그런데 크기가 커질수록 통제는 어려워집니다. 내가 설계했다고 믿었던 방향이 예기치 않은 변수 앞에서 무조건 어그러지고야 맙니다. 그래서 큰일은 두려워요, 내 손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동시에 성숙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작은 일 앞에서는 두려움보다 욕망이 앞서지만, 큰 일 앞에서는 두려움이 먼저 찾아옵니다. 그 두려움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를 맞딱드립니다. 감당의 경계를 아는 일, 그것이 바로 ‘큰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일지도 모르겠어요.


크다는 것은 결국 시야의 문제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거리만큼 세상은 커지니까요. 시야가 좁을 때 세상은 작고 단단해 보이지만, 시야가 넓어질수록 세상은 커지고 동시에 불안정해집니다. 크기를 기회로 여기는 사람은 그 불안정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크기를 위협으로 느끼는 사람은 그 문턱에서 멈춥니다. 두 부류의 사람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감각하는 방식이 다를 뿐.


커지는 것은 외형이 아니라 인식인 거 같아요. 삶의 범위가 확장될 때 우리는 처음으로 ‘나’라는 존재의 경계를 확인합니다. 그 경계를 아는 순간, 크다는 것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커지는 중에 있고, 그 크기를 감당하는 중에 있습니다. 기회와 위협은 언제나 함께 움직입니다. 한쪽이 사라지면 다른 쪽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크다는 것은 그 두 감정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용기이며, 불안과 희망을 같은 그릇에 담는 일입니다. 결국 크다는 것은 ‘살아보며 연습하는 일’인가봐요. 작았던 선택들이 모여 한 생을 이루고, 그 생이 누군가에게 닿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커졌는지, 또 얼마나 작게 남았는지를 함께 깨닫습니다. 크다는 것은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감각하고 또 감각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감각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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