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하는데 화가 나고
성인이 되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혼나는 언어 속에 살고 있습니다. 누가 명확한 권한을 가진 것도 아닌데, 누군가는 쉽게 판단하고 누군가는 설명해야 하는 자리에 놓이곤 해요. 잘못을 말하는 것과 사람을 혼내는 일이 구분되지 않은 채, 관계는 자주 부모와 아이의 구조를 닮아갑니다.
이 감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우리는 미흡한 부모와 완전하지 못한 교육 과정 속에서 자라며, 혼나는 장면을 자연스러운 질서처럼 배워왔어요. 미성년 시절의 혼남은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고, 보호와 책임이라는 전제 안에서 반복됩니다. 이 경험은 혼내고 혼나면 더 나아진다는 감각으로 몸에 남아요. 그래서 어른이 된 이후에도 우리는 서로의 미흡함을 마주할 때, 설명보다 판단을 먼저 꺼내는 데 익숙해집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정의감은 이 판단을 쉽게 합리화하고, 말은 의견이 아니라 교정의 형태를 띠기 시작해요.
그러고 보면 훈육의 시절은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끝나지 않습니다. 청소년기를 거치며 아이들은 부모의 권력에 균열을 내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의 반항은 단순한 불순종이라기보다 관계 구조를 전복하려는 시도에 가깝습니다. 청소년기의 훈육은 사회 질서를 배우는 과정이라기보다 태도와 능력에 대한 강요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춘기를 지나며 반항이 잦아들어도 혼나는 이유가 이해되면서 철이 드는 건 아니에요. 혼내는 말이 더 이상 예전처럼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게 되면서 청소년기는 마무리됩니다. 말해도 바뀌지 않고, 혼내도 먹히지 않는 부모의 말은 권력이 아니라 무시해도 되는 의견으로 이동하고, 그렇게 훈육은 합의가 아니라 효력 상실의 방식으로 흐지부지 끝나요. 그리고 이후에도 내 삶과 태도에 깊숙이 관여하는 부모의 시도를 사랑의 표현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익숙해진 혼의 경험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인간관계 곳곳에 남습니다. 이론적으로 어른 간의 관계는 비대칭을 전제로 하지 않지만, 실제 대화에서는 부모와 아이의 구조가 반복해서 재현돼요. 직장 내 상사와 부하든, 나이가 조금 더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 사이든, 커플 관계든 역할의 차이는 있어도 위계가 필수적으로 적용되는 관계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누군가는 판단하는 자리에 서고, 다른 누군가는 설명해야 하는 위치로 밀려나곤 해요. 이때 서로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잘못의 내용이 아니라 관계의 재배치입니다. '네가 잘못했고 나는 그게 싫으니 내 기준에 맞춰라'라는 메시지가 말속에 스며들며, 대화는 조율이 아니라 복종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흘러가요. 그렇게 혼나는 사람은 내용보다 태도에 먼저 반응하게 됩니다. 가끔 혼내는 사람이 없어도 혼나는 사람이 생기기도 하는데, 혼내고 혼나는 경험 외 다른 경험을 충분히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 구조는 온라인 공간에서 더 빠르고 강하게 드러납니다. 화면 너머 사라진 맥락을 무시하며,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너의 잘못’을 강하게 전제한 채 말을 시작해요. 변명이라는 이름에 가려져 상대에게 설명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이나 생각에 의견을 내거나 질문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러니 너는 닥치고 내 말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순간, 대화는 성립하지 않아요. 합의되지 않은 규범 강제는 설득이 아니라 압박이 되고, 압박은 필연적으로 더 큰 반발을 낳습니다. 사람들은 주장에 반응하기보다 자신을 아래에 두려는 말의 위치에 먼저 반응해요.
가족 안에서는 이 문제가 더 복잡해집니다. 자녀가 부모의 행동을 지적했을 때, 그 말에 혼내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부모가 강하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이 장면은 옳고 그름의 다툼이 아닙니다. 훈육이 끝났다고 인식한 자식과, 아직 관계의 위계를 내려놓지 못한 부모 사이의 시간차에서 발생하는 긴장이에요. 잘못을 지적하는 행위와 혼내는 상황은 분명히 다르지만, 훈육의 기억이 남아 있는 관계에서는 이 둘이 쉽게 겹쳐 보입니다. 자식의 말은 설명이 아니라 권력 역전의 시도로 읽히고, 그 순간 대화는 빠르게 닫혀버려요.
어른들 사이에서 적합한 잘못의 전달은 훈육의 연장이 아닙니다. 잘잘못을 판정하는 일이 아니라 의견을 공유하는 방식에 더 가깝습니다. '그건 잘못이야, 나는 안 그러는데 너는 대체 왜 그러냐'라는 말은 관계를 기울게 만들지만, '나는 그 상황이 이렇게 느껴졌어'라는 말은 상대의 변명을 요구하지 않고, 태도의 수정을 명령하지 않으며, 결론을 미리 정해두지 않은 상태로 전달되는 말이에요. 잘못은 수정의 대상이지, 관계의 서열을 재확인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건, 혼냄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소년기를 지나며 우리는 말해도 먹히지 않는 순간을 몸으로 먼저 배워요. 훈육 이후의 관계는 스스로 다시 배워야 합니다. 사회는 ‘닥치고 따르라’는 문장 위에서 진화하지 않아요. 설명하고-듣고-다시 묻고-합의하려는 느린 언어 위에서만 조금씩 형태를 바꿔갑니다. 훈육의 시절을 벗어나는 과정이 충분히 성찰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서로를 아이처럼 혼내거나 혼난다고 느끼며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믿게 됩니다. 그 지점을 자각해야 어른들 사이의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