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된 헌신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by You앤Me Art Place

[연재:시리즈4]
강요된 헌신

조율과 타협은 다르다.

조율은 본질에 가까이 다가서려는 의지에서 시작된다.
수많은 소리들 속에서 자신만이 찾아 낼 수 있는 진실을 향해 안테나를 세우고 끊임없이 찾을때까지 시도하는 열심이 조율을 온전하게 이끈다.
반면, 타협은 불편한 상황을 직면 할 수 없어서 좀 덜 불편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에게 진실되지 못한 방식으로 필요한 모든 상황을 맞추어 가려는 결정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조율을 선택할지 타협을 선택할지 생각해야 한다.

조율은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다.
타협은 그보다 간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조율은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데에서 기인한다.
타협은 자신이 어떻게 보여질지를 고민한 데에서 기인한다.
조율은 진실에서 시작되고 타협은 자기 기만에서 시작된다.
조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은 만족감이다.
타협의 결과는 만족하기로 마음먹은 마음일 뿐이다.
조율을 택할 것인가 타협을 택할 것인가는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다.
조율에는 지혜가 필요하고 타협에는 얕은 수가 필요하다.

강요된 헌신은 타협에서 비롯 된다.
그것은 조율에서 오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같아 보여도 결과는 다르다.
외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강압적 으로 다가오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밀어 낼 진실한 힘이 있어야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때로 우리의 자존심은 거짓 자존감을 만들어 낸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그럴싸 하게 포장 하기도 한다.
'나는 이타적이야, 나는 너보다 나으니까 이걸 받아 들이고 견디는 거야'라고 생각 하기도 한다.
'나는 헌신적인 사람이야, 나는 이것을 끌어 안고 희생을 하는것이 나와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들은 진정성이 아닌 인정하기 싫겠으나 나약한 타협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야 덜 억울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심파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고 혼자 처량하게 슬퍼하기도 하는데 옆에서 보면 자기연민으로 보인다.
혹은 반대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들은 자신의 면모를 벗어나 찝찝함으로 자신안에 상처로 남기도 한다.
또는 집요하게 벗어나기 어려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 기분으로 남기도 한다.
오래 가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퇴색 되고 역시 그건 아니었구나 하고 뒤늦게 느끼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외부의 압력과 강압이 느껴질 때 그것을 쉽게 거부하긴 어렵다.
어렵다고 해서 시험 문제를 풀 생각 조차 안 하는 것과 같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고민을 해보고 풀 수 있을 때까지 고민 하는 것은 시험을 대하는 자의 바른 태도이다. 정답을 틀리고 오답을 쓸 수도 있지만 결과가 그렇더라도 그것을 고민했던 시간들 그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귀하다.
문제에 매몰 될때 문제의 핵심은 더욱 보기 어려워 진다. 문제를 멀찍이 바라 볼 때 새로운 접근이 가능해진다.
집착으로 가까이 다가서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집중으로 멀찍이 떨어져 제 3자적 관점에서 지켜 보면 다르게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자신이 가진 딜레마에 집착 할수록 왜곡된 주관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손님 대하듯 떨어져서 바라볼 때 주인인 내가 보인다. 주인으로서 손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가 보인다.

나 자신을 전부 던져 놓을 필요는 없다.
나 자신을 굴복 시킬 필요도 없다.
인간의 고유성 그리고 인간의 존귀함이 DNA와도 같이 자신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 고결함은 오롯이 타인이 아닌 자신의 것이며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없으며 형편에 따라 분위기에 따라 변질될 수 없기 때문이다.
괴로워서 슬퍼도 힘들어도 변하지 않는다.

어떻게 조율할 것인가.
먼저 스스로 정직해야 한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존심 뒤에 가리워진 것을 걷어내고 진짜 마음을 직시해야한다.
자신을 수용하고 그것이 아픔이든 수치스러움이든 스스로를 끌어안고 나면 그때 타인의 요구가 얼만큼의 분량인지 가늠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것 까지만 경계를 정해서 내어줄 수 있게 된다.

*위에 게재된 그림은 제가 그린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