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를 사신 아버지

by 원우

아버지 연세가 95세(30년생)이시다. 내가 미국에서 돌아오고 나서 최근 갑자기 아프셔서 응급실에 가셨는데 응급실환자(환자 나이를 보여준다) 중에서는 최고령이시다.


작년 초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오래 사시도록 우리 형제들은 노력했다. 우선 어머님이 계실 때와 같은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어머니를 돌보시던 간병인도 그대로 같이 계시게 했고 아버님이 홀로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시간 날 때마다 나와 누나 가족과 누나 아이들 가족(아들딸과 손주들)을 데리고 수시로 방문하여 맛있는 것 사드리고 같이 시간을 보내시도록 노력했다. 원래 나는 wife를 잘 설득해서 아버지가 계신 아파트에 들어가 살면서 아버지를 모실계획이었으나 아버지왈 " 너는 네 인생 나는 내 인생인데 네가 여기 왜 들어와사니 나는 지금처럼 따로 살고 싶다"라고 하셔서 아버지 주변에 아파트를 구해서 이사했다.


이런 아버지를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살아 계실 때 쓰는 것이 맞는 것 같아 아버지의 삶을(자식이 본)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1950년에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여자친구와 재미있게 대학 축제를 보내고 나서 바로 6.25가 터졌단다. 그때 아버지 집은 원효로었는데 피난을 준비하였으나 한강다리가 끊어져 못 가고 그대로 서울에 남게 되었다.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고 며칠 뒤에 학교에 갔더니 일부 학교 친구들이 붉은 완장을 차고 있고 몇몇 교수들은 그들을 인도하고 있어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을 느꼈으나 그것은 아버지를 짓누르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학교 친구 몇명이 인민군의 모병에 호응하여 입대하고 아버지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민군에 입대했단다.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낙동강 전선)를 받기 전날 아버지는 이런 고민을 했단다. “우리 조상이 이북에서 오래 살다가 조선시대말에 이남으로 이사 왔어도 이북에서 내가 사는 이남지역인 서울을 침략했으면 내가 사는 곳을 지켜야 하는 것 아닌가 지금 사는 곳이 내 고향이고 내 조국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그날밤 화장실 간다고 핑계되고 야반도주를 하셔서 수복 때까지 숨어 지내셨단다.


수복이 되고 나서 군대는 어차피 가야 하니까(젊은 남성들은 다 징집되니까) 이왕이면 장교로 가는 것이 나을 것 같아 공사에 지원하여 합격하셨다. 그 당시 공사는 2년 제로 휴전되기 직전에 졸업을 해서 직접 전쟁에 깊이 투입되지는 않고(그렇지만 동기생 중 그때 희생된 조종사 친구도 있다고 들었다) 그렇게 전쟁이 끝나게 되었다.


전쟁 후에 대학교 복학과 군대를 두고 고민하였으나 아버지는 군대에 남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1950년부터 1985년까지 35년 동안 군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자기 친구가 보고 싶다고 국립묘지에 있는 친구묘에 나를 데리고 간 적이 있다. 묘 앞에서 절을 하고 나서 나는 잘 몰라 아버지한테 여쭤보았다. 이 묘지 안에는 무엇이 있냐고? 아버지는 공군은 육군처럼 시체가 없다고 말씀 하시면서 친구가 쓰던 유품과 일부--- 라고 말씀하시면서 친구는 해상 훈련 중 바다를 하늘로 착각하여(공중에서 몇 번 돌다 보면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훼갈린단다) 바다로 비행기를 몰아서 전사하셨다고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체구가 왜소하고 군대와 거리가 먼 샛님 같고 학교 선생님 같은 아버지를 별로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 깨닫듯이 즉 외면의 껍데기에 현혹되는 나이가 지나고 나서 내면으로 사람을 보게 된 30대 후반에 가서야 아버지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고 군대가 아버지를 참군인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나이가 되니까 내가 아버지였으면 어떻게 그리고 더 잘했을까 하는 질문 그리고 엄마를 대하는 태도 같은 것에서 존경의 염이 생기기 전까지는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는 그저 서먹서먹한 관계였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해서 주변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의 어린 시절의 어리석음에서 많이 깨어나게 되었다. 아버지는 주변에 이북출신 선배장군들이 많은데 아버지가 존경하는 장군 중 한 분은 6.25 때 군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사병과 똑같이 가마니 깔고 자고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군생활을 하신 청렴결백한 분이셨단다. 그분은 또 나의 소중했던 일생중에 단 한번뿐인 내 젊은 청춘시절을 망가뜨린 인간xxx을 끝까지 xxx라 부르지 않고 중간에 "통"짜 빼고 xx로 불렀다는 이야기(그 장군 말씀은 그분이 보기에 이 인간은 자기부하시절 하도 일을못해 핀잔을 많이 주었고 XX까지가 그 인간이 능력상 갈 수 있는 최고 지위라서 그렇게 부른다는 이야기). 겉으로 쎄게 보이는 것이 강한 것이 아니라 내면이 강하고 절제된 행동과 습관을 가진 분들이 무골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그때에 해 보았다.


이렇게 아버지가 그래도 지금까지 장수해 사시는 이유 중에는 이런 것도 있는 것 같다. 아버지는 군대를 나오시가 전까지 청렴결백하셨으며 그래서 따르는 부하가 많았고 그리고 나오시기 바로 직전까지도 비 사관학교출신 부하가 군대의 인재라고 그 후배 진급을 위해서 노력하신 분이시란다.


다시 세월이 흘러 중간중간 한국을 방문할 때 아버지는 같은 병과후배모임으로 바쁘셨다. 모임에 나가면 아버지가 인재라고 높이 산 분은 아주 큰 국영기업에서 최고지위에 오르시고 그 후배의 후배는 어느 지역의 유지(사업을 크게 일으켜)가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나이가 드시면서 건강이 썩 좋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 모임에 나갔다 오시면 후배들 한데 오래사시라고 대접을 잘 받고 오셔서 그런지 건강을 되찾곤 하였다. 그때 주변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군대시절 밑에 사람 괴롭혀 출세한 사람들과 부정을 저지른 사람들이 이런 모임에 나가면 후배들은 면전에서 ‘왜 부르지도 않았는데 올까?”라고 핀잔을 준단다. 이 이야기인즉 이곳에 나타나지 말고(그만 나타나고) 안 보이는데서 조용히 살다 빨리 사라지라는 이야기 아닌가— 세상은 돌고 돈다 그리고 과거의 나쁜 행위는 언젠가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업보)이 내가 아버지한테서 받은 또 하나의 교훈이다.


그리고 우리가 존경하는 “김구”선생이 선택한 곳이 이곳이면 그것은 무조건 맞는 선택이고 내가 선택해야 할 곳이고 번영시켜야 할 책임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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