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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패쓰파인더 Jan 13. 2022

실패 경험담

경찰 생활 25년, 경정 10년을 되짚으며

48살, 호랑이 해가 밝았다는 축원이 열두갑자의 4바퀴를 돌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래 살았다. 마음과 몸은 아직 30대의 어디쯤에 머물러 있는 듯 한데, 곧 반백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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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직장 내 승진 심사에서 탈락했다.

경쟁률이 치열한 승진이라 확률이 낮다는 걸 알았지만, 막상 떨어지니 마음 잡기가 어렵다.

'실패'라는 키워드로 글을 써보려 한다.

올해로 경정 11년차, 경정 승진 이후 직장 생활 10년을 생각한다.

승진이 대표적인 평가 지표라고 생각하면 실패라고 해야 할 듯하다.

'왜 실패했나?', '어쩌다가 실패했나'를 쓰고 넘어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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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고 있는 일은 경찰 내부 데이터 분석과 개발 부서를 만들어가고 운영하는 일이다.

낯선 일이다. 범인을 잡거나 범죄를 예방하는, 딱 떠오르는 경찰일이 아니다.

새로운 일, 설명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 부터 실패 가능성이 높다.

돌이켜 보면, 계속 이 막다른 골목으로 스스로를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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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안해본 것,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다. 해내고 싶었다.

독특한 일을 하면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에 시간을 태운 셈이다.

'묵묵한 헌신'보다 '돋보이는 개성'을 좇았다. 낮은 확률에 스스로를 내맡겼다.

타협보다는 돌파를 선택했다. 승부를 피하긴 커녕 자처했다. 이길 줄 알았다.

싸움을 많이 벌렸으니, 패배도 쌓여갔다. 패배의 경험이나마 내놓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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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정 1~2년차 : ㅇㅇ경찰서 수사과장

집에서 가까운 경찰서로 발령받았다. 한 부서의 장이 된 건 처음이라 신이 났다. 30여명 동료들의 일터를 휘저었다.  들떠서 먹고 마시고 떠드는 나날들. 웃으며 받아주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돌아가서 뵙기 부끄럽다.

서류의 서식을 바꾸게 했다.  상호 평가제를 요구했다. 좌석 배치를 크게 바꾸고 움직이는 동선도 새롭게 했다. 디 좋은 취지라 하지만, 얼마나 피로했을까? 과격하고 인정머리없는 성정도 내비쳤다. 예의도 부족했다.

언제나 낯뜨거운 인성의 박약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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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년차 : 금융정보분석원

금융위원회 산하의 정보분석원이다. 은행에서 신고한 의심거래 내역과 여러 정보와 맞춰보는 일. 관심있었다.

일의 겉면만 만지작 거렸다. 돈의 흐름을 깊이 파고 들고, 궁리하고, 추리해서 가설을 만드는 일들을 대충했다. 유능하긴 커녕 평균에도 못치는 분석관.

그런 주제에 미리 신청했던 해외 교육 훈련을 나가서 여러 관계자들을 곤란하게 했다.

영국에 2달 교육받으러 가기로 경찰서 시절 신청해 승인 받았는데, 파견 나온 곳에서 다시 해외 훈련을 간다고 했으니 전례없는 공백을 인정할 것인가 당혹해 하셨다. 야단을 맡고, 핀잔을 들으며 뒤통수가 뜨거운 상태에서 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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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2달간 영국 훈련 과정은 좋았다. 많이 배웠다.

열심히 정리했다. 두툼한 자료집을 만들었다.  출국 때 상처를 이런 성과로 만회하고 싶었을지도.

상처받고 만회하기 위해 오히려 앞서 했던 행동을 강화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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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년차 : ㅇㅇ경찰서 경제범죄수사과장

경찰청이 대형 경찰서 수사과를 기존의 경제범죄수사팀과 지능범죄수사팀을 과 단위로 나누는 시책을 시작했다. 서울 ㅇ경찰서의 수사과 인원이 100명에 가까워서 실질적인 업무감독이 안되니, 경제범죄수사팀과 지능/사이버/수사지원팀을 분과하는 시범 경찰서의 과장으로 발령났다.

그 정책의 추진 여부도 논쟁이 많았다. 시범 케이스로 그 시행착오들을 헤쳐갈 역할을 하라는 인사였다. 딱 성정에 맞았다. '내가 하면 잘 하지'라는 도전욕에 맹렬히 덤볐다. 원래 한 부서를 두 개로 나누고 팀 구성과 공간을 재배치하는 일을 예전 경찰서 과장 시절의 확신으로 밀어붙였다. 이전 경찰서에서 얻은 얇은 교훈 덕에 1%쯤은 나아졌으려나? 과연 의미있는 소란이었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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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7년차 : 경찰청 ㅇㅇ담당관실

가장 선명한 실패를 겪은 곳이다. 부서명에 '분석'이라는 명칭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나름 '범죄 분석'에 대한 국내외 사례, 식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존 구성원들은 정성적인 분석을 중시하고 분야 전문가, 동료 집단 상호간 응집을 중시했다. 

그 문화를 부정했다. 극복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다.  데이터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고 사용자를 확산하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다시 만들려고 했다. 방향의 옳고 그름을 논쟁했더라면 모를까, 결정하고 지시했다. 이해를 구하지 못했다. 이해를 구하지 못하면 기다렸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공무원에게 유일하게 여유있는 자원은 시간인데, 스스로 만든 일정에 쫓겼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마음의 연결이 끊겼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받고, 그것을 드러냈다. 더 이상 이곳에서 일할 수 없음을 통보받았다. 떠나야 했다.

경정 7년차이면 빠른 이들은 승진에 도전한다. 7년차에 어디서 새로 시작해야 할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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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차~현재 : 경찰대학 치안정책연구소

충남 아산에 경찰대학으로 내려왔다.  경찰청에서 나가면 서울 시내 경찰서에서 재기를 도모하곤 한다. 걱정과 후회만으로 매일을 살면 견디기 어려울 것 같았다. 목표를 계속 잃지 않고 가고 싶었다. 경찰청에서 고집했던 길이 틀리지 않았다고 증명해보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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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많이 내리던 2018년 1월 경찰대학에 첫 출근을 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매일을 실의에 빠져 살지 않겠다는 선택은 매일을 충실히 사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10년차 경정 생활은 총경 승진 탈락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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