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맛은 바람에서부터 시작된다.
동쪽 바람이 불면 바다의 비릿한 향이 먼저 다가오고,
남쪽 바람이 스치면 볕에 말라가는 풀내음이 코끝에 감긴다.
그 바람의 결을 따라 제주의 식탁도 조금씩 변한다.
그래서 제주 음식은 언제나 ‘단독 주연’보다 ‘함께 만드는 앙상블’에 가깝다.
혼자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 맛,
서로의 자리를 비워주며 천천히 조화를 이루는 맛이 있다.
보말국을 끓일 때,
냄비 뚜껑을 열면 칙하고 하얀 김이 먼저 인사를 건넨다.
보말이 익어가며 내는 은은한 바다 향 사이로
파를 송송 썰어 넣으면 초록빛이 국물 위에서 잠시 흔들린다.
그 파 한 줌이 보말의 깊은 맛을 잡아주고,
부엌 안은 ‘제주 집’ 특유의 따뜻한 향으로 채워진다.
여름 저녁, 자리물회를 준비하면
칼끝이 도마를 치는 딱딱,
오이를 썰 때의 서걱서걱,
살얼음 육수가 그릇에 부어질 때의 청량한 촤아 소리가 차례로 퍼진다.
강한 자리향도 오이, 배, 고추와 함께 만나면
갑자기 부드러워지고 순해지는 맛을 낸다.
마치 혼자 있을 땐 다소 거칠어도
누군가 곁에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이 풀리는 사람처럼.
봄날 들에서 꺾어 말린 고사리는
물에 풀어 넣으면 서서히 되살아난다.
손끝에 전해지는 촉촉함,
고사리가 길게 풀어지며 피어오르는 봄의 향.
그 고사리를 멸치육수에 넣고 천천히 끓이면
집 안에 ‘봄 냄새’가 고요하게 스며든다.
제주 어르신들이 말하던
“고사리는 멸치 만나야 제 맛 난다”는 말이
이제야 제대로 이해된다.
서로 만나야 비로소 살아나는 맛이 있다는 것을.
몸국을 끓이는 아침은 더욱 묵직하다.
큰 냄비 안에서 모자반이 바다 향을 뿜어내고,
푹 삶은 돼지고기와 국물이 만나
시간을 들여야만 나오는 깊은 맛을 만든다.
처음엔 서로 다른 재료처럼 보이지만
한 솥에서 천천히 어울리며
하루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묵직한 풍미가 된다.
사람과 사람이 오래 머물며 익어가는 일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다.
오메기떡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면
손의 온기와 반죽의 온기가 섞이며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가 만들어진다.
마지막에 팥고물을 얹는 순간
비로소 하나의 ‘맛’이 완성된다.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나 자신만의 얼굴을 갖게 되는 순간.
이 제주 음식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결국 한 가지 생각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음식도, 사람도.
서로의 결을 인정하고,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고,
필요하면 자리를 내어주고,
때로는 내가 물러서고,
때로는 상대가 한 발 다가오며
맞춰가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깊어진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나는 누군가와 좋은 궁합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오늘, 어떤 맛을 더해주고 어떤 맛을 살려주며 살았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관계를 돌아보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루를 어떻게 살아냈는지를 비추는 거울 같다.
어떤 날은 내가 지나치게 강한 맛이 되어
누군가를 힘들게 했을 수도 있고,
어떤 날은 상대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해
필요한 간을 채우지 못한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 음식처럼
삶도 원래 그런 시행착오 속에서 조화를 배운다.
고사리가 천천히 풀어지듯,
모자반이 오래 끓여야 맛이 깊어지듯,
우리의 관계도 그 속도로 익어가면 된다.
제주 음식은 결국 삶을 가르친다.
너무 짜지도, 너무 심심하지도 않게
관계의 간을 ‘적당히’ 맞춰가는 법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맛을 살려주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깨닫는다.
그 어울림의 비밀 레시피는
사실 오래전부터 우리 마음 속에 이미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본래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알고 태어난 존재일지도 모른다.
다만 바쁘게 살다 보니 잠시 잊었을 뿐.
이제 그 마음을
조심스럽게 다시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삶도, 관계도, 사람도
천천히 제 맛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 남는 깊은 맛처럼,
우리의 하루도 그렇게 서서히 익어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