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누이가 설날에 키우는 강아지를 데리고 왔다.
작은 몸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었다.
색색의 저고리가 어쩐지 사람보다 더 단정해 보여
나도 모르게 한 번 더 눈길이 갔다.
“얘도 세배했으니까 세배돈 줘야지.”
다들 웃었다.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어린 시절 설날이 떠올랐다.
한복을 입었던 우리 자매들.
설날 아침이면 엄마가 꺼내주신 한복을 입고
우리는 집집마다 돌아다녔다.
고름을 여미고,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조심조심 걷던 그 길.
골목마다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들이 계셨고,
어디서나 “왔냐” 하고 불러주던 목소리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른들이 웃으며 맞아주고,
우리는 고개를 숙여 세배를 했다.
그렇게 한 집, 또 한 집 돌아다니던 명절의 풍경.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번거로운 일이었을 텐데,
그때의 우리는 그저 즐겁기만 했다.
요즘의 설날은 조금 달라졌다.
이제는 그런 풍경을 거의 볼 수 없다.
골목을 오가며 세배하던 아이들도,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 계시던 어른들의 모습도
점점 기억 속 장면이 되어간다.
그리고 나는 지금, 지갑을 열고 있는 사람이 되었다.
요즘 세배돈은 예전의 만 원이 오만 원이 된 것 같다.
만원을 꺼내기엔 괜히 성의 없어 보일까 망설여지고,
오만원을 꺼내자니 한 번에 나가는 금액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진다.
한 명이 아니다.
조카들, 사촌들, 가끔은 예상하지 못한 아이들까지.
봉투를 준비하다 보면 명절이 오기 전에
지갑이 먼저 설날을 맞는다.
세배돈도 미리 준비한다.
은행에 들러 새 돈으로 바꾸고,
봉투도 넉넉히 챙겨둔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계산을 한다.
‘작년에는 얼마 줬지.’
‘이번엔 조금 올려야 하나.’
‘다른 집은 어느 정도지.’
아무도 말하지 않지만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는
보이지 않는 기준들이 있다.
어릴 때의 나는 이런 마음을 전혀 몰랐다.
세배를 하고 세뱃돈을 받으면
그날 하루가 다 가진 것 같았다.
천 원, 오천 원. 그 돈을 손에 쥐고
괜히 더 크게 웃고, 괜히 더 많이 받은 것처럼
마음이 부풀었던 날.
그때는 얼마를 받았는지보다
얼마나 즐거웠는지가 더 중요했다.
지금의 설날은 조금 더 편해졌지만,
조금 더 현실적이 되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기대보다 먼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떠오른다.
선물,
차례,
세배돈.
마음보다 해야 할 일들이 먼저 줄을 선다.
강아지까지 세배돈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웃으면서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리가 조금은 형식에 더 익숙해진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올해 설날에는
조금 다른 마음을 가져보려고 했다.
얼마를 주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건네는지를 생각해보자고.
비교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그저 따뜻한 마음으로 건네보자고.
그렇게 다짐했지만
막상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여전히 눈치를 보게 되고,
여전히 금액을 고민하게 되고,
괜히 혼자 기준을 맞추며 마음을 저울질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그 사이에서 조금 씁쓸해진다.
그래도, 연휴 마지막 날
친정 식구들이 모여 앉았다.
한 명씩 세배를 하고, 웃으며 봉투를 주고받고,
괜히 농담을 건네며 다시 아이처럼 웃는 시간.
누군가가 꺼낸 윷놀이판 위에
윷이 던져지고,
“도다!”
“아니야, 개야!”
“한 번 더 던져!”
목소리가 커지고, 웃음이 이어지고,
그 안에서 누가 얼마를 줬는지는 잠시 잊혀진다.
그 순간만큼은 생각이 단순해진다.
아,
이게 설이지.
완벽하지 않아도,
조금은 부담이 있어도,
그래도 함께 모여 같이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날.
세배돈의 금액보다
그날의 웃음이 더 오래 남는다는 걸
다시 한 번 알게 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