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역사: 을(乙)이 써 내려간
가장 아름다운 패전

by hongrang

나의 고백사는 낡은 흑백 필름처럼 국민학교 시절의 작은 학원 골목에서 시작된다. 그때의 사랑은 단어라기보다는 차라리 '상태'에 가까웠다. 중학교 내내 마음을 졸이며 한 사람의 주변을 위성처럼 맴돌던 시간. 그 길고 긴 공전의 끝은 중학교 졸업식 날에야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다섯 시간을 기다려 마주한 그녀의 대답은 "친구로 지내자"는 담백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훗날 나의 첫사랑이 형의 연인이 되어 나타났을 때, 나의 고백사는 비극을 넘어선 지독한 희극의 한 장면이 되었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달콤한 노래겠지만, 나에게 고백이란 늘 피비린내 나는 패잔병의 무용담과 같았다.


사랑은 언제나 '을'의 역사였다

사람들은 흔히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승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치열한 전장에 몸을 던져본 이들은 안다. 사랑은 언제나 철저한 '을'의 역사라는 것을. 고백은 내가 가진 가장 약한 부분을 상대에게 기꺼이 내어주는 행위이며, 내 행복의 결정권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항복 선언과도 같다.

나의 청춘은 늘 짝사랑으로 시작되어 '을'의 위치에서 서성이다 끝나곤 했다. 그 과정은 결코 우아하지 않았다. 거절의 언어를 수집하고, 돌아선 뒷모습을 갈무리하며, 혼자만의 방에서 패배의 기록을 적어 내려가는 일. 그것이 내가 아는 고백의 민낯이었다.


마침내 당도한 희극의 풍경

그 길고 처절했던 '을의 역사'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 곁에 있는 '현(現) 사랑'이 더욱 기적처럼 다가온다. 수많은 짝사랑의 파편들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문장이 된 것이다.

이제야 깨닫는다. 고백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결과가 승전보이기 때문이 아니다. 패배가 예정된 전장일지라도, 자신의 진심을 온전히 쏟아부은 패잔병만이 가질 수 있는 숭고한 용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가슴으로 다시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미는 그 비련함이야말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뜨거운 진실이다.

비록 나의 고백사가 을의 역사로 점철되었을지라도, 나는 그 기록들을 사랑한다. 그 수많은 거절과 기다림의 시간들이 나를 깎고 다듬어, 마침내 이 평온한 풍경 속에 서 있게 했으므로. 고백은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아름답다.



230131000033930034 복사.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