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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기생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

by 뉴욕 산재변호사

넷플릭스 드라마 <기생수: 더 그레이>를 보며, 내내 귓가에 맴돌던 대사가 있다. 인간의 몸을 숙주 삼아 살아가야만 하는 기생수 중 하나가 내뱉었던 그 한 마디, "우리는 그저 살아가기를 원할 뿐이다." 이 단순하고도 본능적인 문장은 단순한 공포물을 넘어선 이 작품의 깊이를 상징하며, 우리의 가슴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처음 기생생물이 등장했을 때, 그들은 분명 공포의 대상이었다. 예측 불가능한 변형 능력으로 인간을 사냥하고 포식하는 그들의 모습은 보는 이에게 섬뜩한 경외심과 함께 본능적인 혐오감을 안겨주었다. 당연히 우리는 인간의 편에 서서 저 '괴물'들을 타도해야 할 '악'으로 규정했다. 그들을 향한 증오는 쉽고, 그들을 응징하는 것은 통쾌한 정의 구현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살아가기를 원할 뿐이다"라는 대사는 그 모든 편협한 시선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잔혹한 살육의 현장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광기 어린 생존 본능의 뒤편에 숨겨진 가장 원초적인 욕구는 다름 아닌 '생명 유지'였다. 그들은 악의를 가지고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종족을 보존하고, 개체로서 존재하기 위해, 그들에게 주어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마치 사자가 사슴을 쫓고, 식물이 햇빛을 갈구하듯, 그들의 존재 방식은 그들 생존의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당혹스러운 감정에 휩싸인다. 인간의 입장에서 '악'으로 규정했던 그들의 행동이, 그들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생존'이라는 대의명분 아래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로 향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간은 과연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가? 성경 창세기에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축복이자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강력한 말씀은 인류에게 지구를 다스릴 권한과 책임을 부여한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인류는 이 말씀을 충실히 따르려 노력했고, 그 결과 문명을 일구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며 지구의 지배적인 종으로 번성했다.


하지만 그 번성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우리는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을 '땅을 파괴하라'는 왜곡된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까? 우리의 '생육하고 번성함'은 다른 수많은 생명체를 멸종시키고, 서식지를 파괴하며, 지구의 환경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오염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우리는 무한한 성장과 소비를 추구하며,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기생수들이 인간을 숙주로 삼는 것이 본능적인 생존 방식이었듯, 인간이 지구를 숙주 삼아 자원 고갈을 초래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들의 '살아가려는' 욕구, 그리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인간 위주로 해석한 결과가 아닌가.


결국 <기생수>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선다. 그것은 '생존 대 생존'이라는, 모든 생명이 피할 수 없는 근원적인 대립을 보여준다. 나의 생존이 너의 생존을 위협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누구의 생명이 더 고귀한가? 이 질문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구 생태계 안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그리고 다른 생명체들과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로 이끌어간다.


"우리는 그저 살아가기를 원할 뿐이다." 이 대사가 이토록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 즉 인간이 오랜 세월 외면해왔던 불편한 진실을 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재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생수를 통해 우리 안의 '기생수적인' 면모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만이,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더 나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성경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번성하는 것을 넘어 피조세계를 돌보고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혜'에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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