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누구와 어울리느냐가 중요하다. 파리와 어울리면 평생 똥간에서 뒹굴다 생을 마감할 것이고, 벌과 어울리면 꽃밭을 거닐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삶의 방향과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직관적으로 잘 드러낸다. 파리는 더럽고, 벌은 고귀하다는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떤 존재와 함께하느냐가 곧 어떤 삶을 사느냐를 결정한다”는 교훈을 비판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비유에는 분명한 전제가 깔려 있다.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시각이다. 인간의 미적 취향과 위생 기준, 그리고 인간에게 유익한가 불쾌한가라는 판단이 곧바로 존재의 가치로 환원된다. 그 기준에서 파리는 실패한 삶의 은유가 되고, 벌은 성공과 이상적인 삶의 상징이 된다.
하지만 시선을 인간에서 지구 전체로 옮기는 순간, 이 비유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띤다. 파리는 썩은 것, 버려진 것, 죽은 것을 분해하며 생태계의 순환을 책임지는 핵심적인 존재다. 사체와 배설물, 음식물 쓰레기를 빠르게 처리함으로써 토양으로 영양분을 돌려보내고, 수많은 생물의 먹이가 된다. 파리가 없다면 세상은 더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썩고 정체될 것이다. 지구의 관점에서 보자면 파리는 불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노동자다.
냉정하게 말하면, 지구에 기여하는 정도만 놓고 보았을 때 파리는 인간보다 이롭다. 인간은 편리함과 발전을 명분으로 자원을 고갈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며, 기후 위기를 가속화해 왔다. 반면 파리는 자신이 태어난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다. 파리는 지구를 바꾸려 들지 않고, 망치지도 않으며, 그저 맡은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직설적으로 말해, 인간이 사라지면 지구의 생태계는 더욱 건강해지겠지만, 파리가 없어지면 지구 생태계는 큰 교란을 겪게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떤 존재가 더 고귀한가?”가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고귀함을 판단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꽃밭을 거니는 삶이 반드시 더 가치 있는 삶일까? 똥간에서 굴러다니는 삶은 정말로 하찮은 삶일까? 지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그 ‘똥간’이 순환의 시작점이며, 생명의 회복이 일어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미생의 대사는 인간 사회를 설명하는 데는 유효하지만, 그것을 자연과 존재 전체의 가치 판단으로 확장하는 순간 위험해진다. 우리는 너무 쉽게 “보기에 좋은 것 = 옳은 것”, “불쾌한 것 = 무가치한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자연은 그런 미적 판단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자연은 오직 역할과 균형으로 존재를 평가한다.
결국 이 비유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벌처럼 살고 싶은가, 파리처럼 살고 싶은가가 아니라, 나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더 큰 질서 속에서 어떤 존재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지구에 이로운 존재가 반드시 인간에게 사랑받는 존재일 필요는 없다. 어쩌면 우리가 가장 경멸해 온 존재들이야말로, 가장 성실하게 세상을 떠받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