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속 '썩어 문드러질 몸'에 대한 반론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흥미로우면서도 곱씹어볼 만한 장면이 등장한다. 과중한 업무와 스트레스, 그리고 동료들 사이의 미묘한 피어 프레셔(Peer Pressure) 속에서 한 변호사는 일탈을 결심하며 이렇게 외친다. "어차피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인데 원나잇 좀 하면 어때?"
그 호기로운 선언은 곧바로 실행으로 옮겨진다. 그녀는 술집에서 만난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술이 덜 깬 채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화장기 없는 얼굴로 법정에 나타난다. 이 장면은 소위 "결혼 적령기" 직장인의 애환과 일탈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의도된 것으로는 보이지만, 나는 그녀의 행동 그 자체보다 그녀가 내뱉은 그 '한마디'에 더 깊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물론 성인으로서의 개인적인 선택이나 '원나잇' 자체를 도덕적으로 재단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어차피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이라는 전제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대사 속에는 몸을 단지 정신이 잠시 머무는 껍데기나 도구로 여기는 오래된 철학적 사고가 깊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형적인 데카르트 식 심신이원론(Mind-Body Dualism)의 발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 아래, 정신은 고귀하고 본질적인 '나'인 반면, 몸은 기계적이고 부차적인 대상에 불과하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몸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 객체일 뿐이기에, 몸을 어떻게 다루든 고귀한 정신인 '나'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몸이 쾌락의 도구로 소모되든, 술에 절어 있든, 그것은 썩어 없어질 물질의 문제일 뿐 정신의 문제는 아니라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인지과학은 이러한 이분법이 환상에 불과함을 증명하고 있다.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 이론이 말해주듯, 정신과 몸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다. 뇌는 홀로 떠다니는 섬이 아니라, 신체라는 물리적 기반 위에 존재하며 신체의 상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 현대 과학만이 이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자 김용옥은 '이 몸 하나 지켜내는 것이 모든 철학 문제의 근본이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몸은 썩어 문드러질 껍데기가 아니라, 내가 세상과 소통하고 나를 완성해 나가는 유일한 근거지다. 그러니 오늘 내 몸을 돌보는 일은, 가장 구체적이고도 위대한 철학적 실천이라는 것이다.
드라마 속 변호사의 다음 날 아침을 보자. 그녀의 정신은 과연 몸으로부터 자유로웠는가? 숙취로 인한 두통, 씻지 못한 몸의 찝찝함, 피로한 근육은 그녀의 인지 능력을 저하시키고, 법정에서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몸이 흐트러지면 정신도 덩달아 흐트러진다. 몸이 보내는 신호는 감정을 조작하고, 판단을 바꾸며, 결국 그 사람의 하루를 지배한다. 그녀가 호기롭게 외쳤던 "원나잇, 상관없다"는 논리는 법정에 선 순간, 스스로의 초라한 모습에 의해 처참히 반박당한 셈이다.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유한한 육체이기에 막 다뤄도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우리에게 주어진 몸은 단 하나뿐이며, 이 유한한 육체야말로 내 정신이 세상을 경험하고 사고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에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오늘 내가 내 몸에 무엇을 먹이고, 어떻게 재우고, 어떤 경험을 하게 하느냐는 단순히 건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내 정신의 질(Quality)을 결정하는 문제다.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것은 곧 내 영혼을 함부로 대하는 것과 같다. 오늘 하루 내 몸의 컨디션이 나의 기분을 만들고, 그 기분이 태도가 되며, 그 태도가 쌓여 일주일, 일 년, 그리고 평생의 삶을 형성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영혼의 감옥'이나 '일회용 쾌락의 도구'가 아닌, '나 자신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썩어 없어질 운명이라서 하찮은 것이 아니라, 그 유한함 속에서 매 순간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지탱하고 있기에, 우리 몸은 오늘 하루 더 존중받고 아껴져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