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688

3월 28일 휀룸의 역할

by 마법사

휀룸이라는 곳이 있다.

지하주차장 화재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공간이다.


불이 나면 연기를 감지한 센서가

이곳의 배기 모터를 자동으로 돌린다.

연기를 밖으로 빼내기 위한 장치다.


불은 눈에 보이지만
연기는 눈보다 먼저 사람을 잡는다.

그래서 휀룸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공간이다.


이 공간은 다른 역할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청소 반장님들의 생활공간이다.

청소도구가 놓여 있고,
걸레를 빨고, 잠깐 숨을 고르기도 하는 곳.

추위를 피하고,
더위를 피하고,
주민들 눈을 피해 잠시 쉬는 자리.

어찌 보면 가장 인간적인 공간이다.


얼마 전에는
동대표가 걸레 방치를 지적한 이후로

이곳이 더 중요해졌다.

지하주차장 벽에 걸레를 널어두면
민원이 들어온다.


그렇다고 휀룸 밖에 두기도 어렵다.

결국 선택지는 하나다.
안에서 해결하는 것.


문제는
그 ‘안’이 항상 제대로 돌아가진 않는다는 데 있다.

“수도꼭지가 이상해요.”

청소 반장님이 말했다.

가보니 꼭지를 다 잠갔는데도 물이 조금씩 새고 있었다.

압력이 센 탓인지 계속 물이 떨어지고,
그 물은 다시 PIT로 모인다.


물은 어디든 갈 곳을 찾는다.

수도꼭지를 교체했다.


처음엔 대충 끼웠더니 역시나 물이 샜다.

다시 풀고 테프론 테이프를 감고
조금 더 신경 써서 조였다.

그제야 물이 멈췄다.


이 일은 크게 티 나는 일은 아니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하나씩 맞아야 청소는 돌아가고,

공간은 유지되고, 아파트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굴러간다.


휀룸은 화재를 대비한 공간이지만,

사실은 사람들이 하루를 버티는 공간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곳이 제대로 돌아가야

보이는 곳이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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