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라진 곳에서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안의 새로운 여정에 나서는 것이다. 유배처럼 낯익은 것들로부터 추방된 혹독한 길을 걸을수록 글은 치열해지고 시공간을 초월해간다. 이러한 몰입에 이르게 되면 그때는 오히려 낯선 시간들이 내게로 걸어와 나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내가 사라진 곳에서 새로운 내가 태어나는 것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주술처럼 몇 가지 채비를 챙긴다. 나침반과 같은 뉴에이지 피아노 연주곡, 일상이 끼어들 틈 없이 방음이 완벽한 헤드폰, 이역을 기록할 한글프로그램 신명조 10 장평 97% 자간 -3% 줄간격 160, 공복을 공급해주는 진한 커피 한 잔. 그 다음은 무의미한 시간에 맞설 수 있는 구석진 방이면 된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 그렇게 사색이란 나를 남겨두고 낯선 곳에서 일생을 살다온 생각과 만나는 시간이다.
나는 기행(奇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누대의 생이 거쳐온 방식을 뒤따를 뿐이며 아직 보지 못한 것을 보려할 뿐이다. 낯선 곳을 상상한다는 것은 낯선 삶, 낯선 나의 눈동자를 상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글쓰기는 나의 밖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응시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낯선 내면의 영혼과 닿을 그때만이 몸속을 떠도는 음악에 체류할 수 있다. 마음에 새겨지고 침식하고 먼지가 되어가는 그 흔적에서 생은 음계를 이룬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것은 나를 기억하고 들으려 하는 행위이다. 기억이 가지고 있는 흔적, 기억에 찍혀 있는 그 지문을 읽어 들이는 것. 그것이 경험이든 상처이든 글쓰기는 명멸을 거듭하는 내면의 생을 이해하는 형식으로 쓰여진다. “나는 감정의 죄수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만 하고, 잊어야만 하고, 용서해야만 한다. 그것만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 (루이즈 부르주아)
여기에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약간의 불행과 고독, 쓸쓸함 같은 것이다. 가없는 침묵에 뿌리를 드리우는 듯한 감정. 녹록치 않은 삶의 연속이라는 느낌. 또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상. 그 영역에 접속하게 되면 죽음도 단지 바깥이라는 기분이 든다. 그곳은 나에게 있어 도달해야 할 영역이다. 그렇게 나는 늘 내가 거역할 수 없는 은유가 운명처럼 나를 데려간다고 믿는다. 마치 백석의 흰 바람벽처럼.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백석) 비애는 위독하지만 아름답지 않은가. 연애인 듯 실연인 듯 청춘을 앓아보는 것 또한 내가 생각하는 세계의 배경이다. 안개처럼 희미하지만 기억이 가지고 있는 청춘의 표식이나 상징은 생각의 밀도를 짙게 한다.
생각해 보건데 글쓰기는 기술이 될 수 없다. 얼마만큼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글의 표현에서 진정성이 담겨져야 읽는 이의 감성에 승인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진실일수록 깨달음의 진폭이 크고 성찰에 대한 미각도 다양하다. 이렇듯 글로 인해 스스로의 변화를 가져왔다면 그것이야 말로 미학적 경험이다. 글을 쓰고도 글을 읽고도 달라질 것이 없다면 우리는 아직 원시의 동굴에서 횃불에 비친 제 생애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글을 통해 투과되는 나를 찾아내고 그 너머의 실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글쓰기이다. 매순간 살아 있다는 가치, 글 쓰는 시간에 대한 향유를 전제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첫 문장에 접어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