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택 에세이
아주 오래전 본 시월애라는 영화에서였던가. 우편함에 편지를 넣으면 과거의 같은 우편함으로 편지가 전해지던. 그리고 그곳에서 정확하게 답장이 왔다. 시간은 그저 보이지 않는 소인일 뿐이었다. 걷다가 공중전화 부스를 볼 때마다 영화 장면이 겹쳐 생각에 잠기곤 한다. 수화기 들고 동전 넣으면 과거 공중전화 부스 안의 나에게로 연결된다는 상상. 그 시절 전화를 받으면 곧바로 끊겼던 순간이 혹시 미래의 내가 연락해왔던 건 아닐까 하고. 아직 거기 있다고 그랬을까, 아니 여기의 무엇을 말해달라고 했을까.
몇 차례나 술자리를 옮긴 모임에서 휴대폰이 사라져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 일행과 헤어진 터라 불콰해진 얼굴로 지나는 사람에게 전화를 잠깐 빌릴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하는 수 없이 근처 공중전화 부스로 가서 내 휴대폰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어쩌면 휴대폰은 낯선 곳에서 처음으로 내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통화 연결음 너머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부스 안 잿빛 기판의 숫자들은 수많은 검지가 스쳐간 흔적으로 색이 닳아 있었다. 하늘색 사각 프레임 안에서 무언극 하듯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그때였다. 여보세요?
네, 그 알려주신 전화번호… 바로 접니다. 한쪽 어깨에 수화기 끼우고 향기 은은한 꽃편지지를 들여다봤다. 두 팔로 안아도 손끝이 닿지 않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샛길을 호위하던 모퉁이에 공중전화가 있었다. 군사우체국 계단 옆도 편지 같은 잎들이 울긋불긋 쌓여갔다. 누군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바스락거리며 발자국 먼저 읽는 소리. 군복 바지 주머니에 두툼하게 든 동전이 너의 목소리 들으려 침을 삼키는 사이, 나는 생각했다. 수화기 줄을 타고 전화선이 들판과 산 가로질러 강을 에돌아 너의 도시에, 너의 집에 닿는 전송의 느낌. 구름이 펼쳐 놓은 밑줄에 들어찬 말들, 산비탈 참호에서 보초 서며 육군수첩에 또박또박 적은 시인지 연애인지 모를 글자들.
니체며 에리히프롬이며 키에르케고르였을 주말의 날씨는 청명하고 설렜다. 군복 주름 날을 세워 입은 나는 겉멋 부린 군인이었고 그녀는 여대생이었다. 저는 군번 끝자리가 30으로 끝나는 육군 부대 상병입니다. 기다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혹시 그 인연인지 국문학과 30번인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펜팔로 필체를 알게 된 몇 개월이 지나자 처음으로 건네 왔던 전화번호였다. 얼굴도 모르는 그녀는 심은하가 되었다가 전지현이 되었다가 전도연이 되었던가. 20분 째 덥혀 놓은 수화기가 반대편 귀로 옮겨가 온기 전하는 가을. 그러니까 거기가 ○○여대 근처라고요?
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네 엄마.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오자마자 몇 발작 뒤에 있던 사내가 부스로 들어갔다. 내가 기다렸던 만큼 그가 기다렸을 시간이 공중전화 부스 창에 입김으로 서렸다. 교회 첨탑 아래 늘어뜨려진 전선에서 알전구가 반짝였다. 그 너머 산비탈 집들의 창문에서도 작고 네모란 불빛이 점점이 이어졌다. 자취방으로 가는 길은 슈퍼를 끼고 골목 담장으로 흘러갔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는 소주와 과자봉지가 서걱거렸다. 가로수나 교차로 벼룩시장의 구인란에 동그라미 치던 겨울밤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 시절 공중전화에서 수없이 걸었던 번호들이었는지 모르겠다. 외로워서, 불안해서, 보고 싶어서 연결되길 원했던 미래였을 테니까. 지금 거리의 공중전화는 추억의 화석이 되어가는 중이다. 과거에서 발신된 전화가 드르륵 드르륵 행간에서 울려오고 있는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