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묻힌 사람에게 건네는 인사

그 자리에서만은 내 감정을 안전하게 묻을 수 있었으니까.

by 김순현

우리 섬에는
내가 편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존재가 단 하나 있다.

바람도 머물다 가는 이 작은 땅에서
오직 그 사람만은
늘 같은 자리에 누워 있다.

팽나무 아래, 잔디를 조금 눌러 놓은 그곳.
돌 하나 세우지 않았지만
내가 늘 찾는 자리.

그 아래엔
알고 지낸 할아버지가 묻혀 있다.

언젠가부터 나는
막걸리 한 병을 들고
그 자리에 가 앉는 습관이 생겼다.

잔디 위에 병을 올려놓고,
혼자 말하듯
툭, 하고 말을 뱉는다.

“참… 힘드네요.
그죠, 할아버지.”

늘 그 말부터 시작했다.
누가 보면 기이한 장면이겠지만,
내게는 이게
가장 진심을 꺼내는 방식이었다.

이상하게도
대답이 없는 존재 앞에서는
마음이 조금씩 풀어진다.

누구의 반응도 없다는 건,
이야기가 다르게 전해질 일도 없고,
해석되거나 이용될 일도 없다는 뜻이니까.

나는 그 침묵을 믿는다.
그건 내 말이
다치지 않고 머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어쩌면
이 할아버지를 좋아했던 이유는
살아있을 때부터
말이 없던 분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뚝뚝하셨고,
그래서 더 신뢰가 갔다.

그런 사람에게 말 건다는 건,
어떻게 보면 일방적이지만
다른 시선으로 보면
가장 순수한 신뢰의 표현이다.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은 결국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요를 찾는다.

그리고 내 고요는
이 팽나무 아래,
말이 없는 사람과의 대화였다.

할아버지 앞에 앉으면
어느새 나도 나무처럼 조용해졌다.
말을 뱉는 게 아니라
숨을 쉬듯 흘려보내는 것에 가까웠다.

속이야기를 말로 꺼내는 게 아니라,
마음 안쪽의 수액을
조용히 흘려보내는 느낌.

그건 울음과도 닮았고,
때로는 기도처럼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나는 그 그늘 아래서
말했다.

그건 어쩌면,
나를 위한 장례였는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서만은
내 감정을 안전하게 묻을 수 있었으니까.

누군가는 그걸
슬프다 하겠지.
혹은 병든 정서라고도.

하지만 나에겐
그저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말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사람은 여전히 어렵다.

그래서 나는
말이 없는 존재와
오늘도 막걸리를 나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가장 진심에 가까운 말 하나를 툭, 흘린다.

“참… 인생이 쉽진 않네요.
그죠,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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