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아를 양육하는 부모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이미 구조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인 사회적 약자다.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아직 한 번도 배우지도 경험해보지 못한 불확실한 과제를 떠안은 채, 조직과 사회가 요구하는 예측 가능한 일상을 동시에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직은 여전히 같은 말을 반복한다. 출근 시간은 변하지 않아야 하고, 성과는 유지되어야 하며, 공백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만약 부모에게 허용되는 법적 제도를 활용하는 경우 많은 부분에서 불이익을 감내해야한다.
이 간극 속에서 부모는 가장 먼저 약해진다. 아이가 아니라 조직의 효율을 중심에 두고 설계된 시스템 안에서 부모는 아이의 시간표에 맞춰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고, 그마저도 어려운 부모들은 시간제 부모 역할을 대신해 줄 공공, 사설 돌봄서비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아이의 질병이나 예기치 못한 사건은 언제든 일상에 공백을 만든다.
이 공백을 메우는 방식은 부모의 여유나 사회의 책임이 아니라, 소비재와 서비스다. 이 소비는 선택이 아니다. 일을 유지하기 위해 강요된 최소 비용이다.
산후조리원, 가정방문 보육, 가사 서비스, 하원 보조, 돌봄을 위한 학원들... 태권도, 피아노, 수학, 숙제 관리까지.
이 모든 소비의 공통점은 부모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장치다.
국가와 지자체는 양육자에게 더 많은 소비 선택지를 제공하는 주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공이 해야 할 일은 부모에게 서비스 구매 능력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안정성을 회복시켜 주는 제도를 설계하는 일이다.
양육을 개인의 관리 실패로 취급하고 서비스로 외주화하는 순간, 국가는 책임을 진 것이 아니라 책임을 시장에 넘긴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부모를 가장 취약한 소비자로 더욱 밀어 넣을 뿐이다.
국가와 지자체의 육아 지원이 이 소비를 보조하는 수준에 머무를 때, 양육은 점점 관계가 아니라 외주가 된다. 그 결과 부모는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의 일정을 관리하고 서비스를 연결하는 관리자가 된다. 먹이는 기능, 재우는 기능, 학습을 연결하는 기능만 남은 관계에서 아이는 함께 불편함을 견디는 어른을 경험하지 못한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불편함을 함께 통과해 본 적 없는 아이들은 갈등을 조정하기보다 회피하고, 관계를 쌓기보다 교체하는 방식에 익숙해진다. 우리는 지금,
가족 안에서 불편함을 견디는 연습을 하지 못한 아이들을 사회로 내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 사회를 여전히 ‘가족 중심적’이라고 부르는 말은 이미 오래전에 설득력을 잃었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