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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nogoodnw Feb 08. 2021

무제

1사 만루, 타석에는 맹타를 휘두르던 4번 타자.
찬찬히 볼을 고르던 4번 타자가 직구 타이밍에 힘 있게 방망이를 휘두른다.
깡- 그러나 유격수의 호수비에 막혀 6-4-3 더블플레이로 이닝이 종료된다. 해설자의 입에서는 기세가 넘어갔다는 말이 나오고, 마치 짠 듯이 지금껏 상대 타선을 꽁꽁 묶고 있던 우리 팀 에이스는 상대방의 하위 타선에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대량 실점하고 만다.
3판 2선으로 치러지는 세계 기전. 일 수 일 수에 혼을 담은 두 기사의 이야기는 어느덧 종반을 향해 달려간다. 반집을 엎치락뒤치락하던 명승부는 5급만 되어도 볼법한 착각에 의해 종국을 맞고, 씁쓸한 웃음만이 대국장을 메운다. 다음날 펼쳐진 2국, 전 날의 충격을 벗지 못한 탓인지, 힘 한 번 써보지 못한 채 결승은 마무리된다.
기세. 사전적 의미로는 기운차게 뻗치는 모양이나 상태. 되게 어렸을 적, 조금 더 자세히는 승리와 패배를 구분할 수 있을 적부터 수없이 접한 저 단어를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었다. 모든 승부/승부 속의 순간들은 독립 시행에 불과한데 대체 왜 기세라는 것이 중요할까. 기껏해야 미완의, 비합리적인 인간을 드러내는 말이 아닌가. 승부는 지더라도 기세에서 밀려서는 안 된다. 얼마나 바보 같은 말인가. 기세에서 밀리더라도 승부에서는 이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2020년은 내게 참으로 감사한 한 해다. 비록 신년 목표로 삼은 것들은 단 하나도 이루지 못했지만, 목표보다 훨씬 값진 경험들을 겪었다. 그것이 슬픈 경험이든, 기쁜 경험이든. 아마 31살의 민동우보다는 31.9세 정도를 지나고 있는 민동우가 훨씬 더 어른에 가깝다. 그리고 31.9세의 나는 이제야 사람들이 말하는 기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기세는 말 그대로 기세다. 사전적 의미보다 기세를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다. 그랬다면 그 표현이 기세의 사전적 의미가 되었겠지. 왜 예전에는 이렇게 쉬운 단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합리적 인간과 같은 그럴듯한 단어만 늘어놓았을까. 그러니까 항상 기세에서 밀렸지. 기세는 기세다.
그래 봐야 나는 나라서, 남들이 보기에는 기세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간다. 항상 힘 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살아간다. 가끔 누군가가 나를 부르면 어설프게 인사하고, 친구들을 만나서는 정신없이 웃기만 하고, 집에서는 방문을 닫은 채 누워있기만 한다. 그래도 나는 이제 기세를 아니까 문제없다. 기세를 모르던 나는 기세 없이 살아갔으나 지금의 나는 같은 삶을 살아도 기세 있게 살아가니까.
승부는 이겨야 한다.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남을 이겨먹어야 한다. 지금의 나는 기세를 탔다. 꺾이지 않는 기세를. 누군가에게 질 수 있다. 하지만 지지 않았다. 즐거운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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