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imnogoodnw
Apr 01. 2024
바둑에서, 수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으로 ‘수나누기’라는 것이 있다. 하나의 참고도에서, 최종 형태는 동일하게 만들되 중간 수순을 뒤섞어 검토함으로써 특정 수가 충분한 당위를 갖고 두어졌는지 평가하는 방법이다. 가령 1-2-3-4라는 수순을 가진 참고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수순을 1-4-3-2로 뒤섞었을 때, 만약 4에 대한 대응으로 3이 이상한 수라면, 본 수순에서 2에 대한 응수로써 3 역시 이상한 수가 된다. 순차게임이라는 바둑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방법이다.
사실 ‘수나누기’는 요즘 그 활용 빈도가 많이 떨어졌다. 인공지능만 틀어놓으면 매 순간 최선의 참고도를 보여주고, 착수 가능한 수들의 승률도 계산해 준다. 해설자들은 ‘인공지능은 이게 최선이라고 하네요.’라 연신 반복한다. 프로는 물론이고, 바둑에 관심 많은 일반인조차 인공지능을 갖고 바둑을 공부한다. 기력의 척도는 언젠가부터 인공지능이 제시하는 수와 얼마나 비슷한 수를 둘 수 있느냐가 된 지 오래다. 바둑 검토 및 해설에서 주로 사용되던 ‘수나누기’가 본인의 자리를 잃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과거의 ‘나’들이 엄청 힘써서 만든 게 지금의 ‘나’다.’ 참으로 멋진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연속적인 내가 모여 그것의 연장을 이루는 ‘나’를 만든다. 삶은 태어남에서부터 시작해서 비가역적인 시간을 따라 흘러가니까 이를 반직선에 비유한다면, 매 순간의 ‘나’는 반직선을 이루는 하나하나의 점이 될 것이고, 내 점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생성될 것이며, 지금의 ‘나’는 뻗어나가고 있는 반직선 그 자체이다.
저 멋진 생각에 따르면, 원점 O에서 연속적인 n에 대하여 특정 시점 tn까지의 내가 과거시점 tn의 ’나’이고, 순간의 생성 그 자체는 나의 의지와 무관할지 모르나, 나는 엄청 힘쓰고 있으니까(사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의지를 반영하는 일일 게다) 반직선의 진행 방향은 내가 결정하게 된다. 나의 삶은 그러니까 벡터의 형식을 갖는 것인데, 그 크기는 일정하게 흐르는 시간에 비례하고 그 방향은 나의 의지가 투영된 내 과거들의 합성함수가 된다. 물론 그 연산은 비단 단순 합도, 곱도 아닌 새로운 연산자일 것이다(삶의 비밀을 푸는 열쇠일진대, 아마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을 것).
바둑과 인생은 참 많이 닮았다. 이리 둬도, 저리 둬도 한 판의 바둑, 이리 살아도, 저리 살아도 하나의 인생. 이 말만으로 이미 족하다. 인생에 대한 비유로서 바둑이 종종 채택되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훨씬 인간적이어서, 열심히 한 수 한 수 두어나가다가도 쉬어가며 지나온 수들을 검토해 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무한정 훈수를 듣는 것도 허용된다. 이 커다란 바둑판 위에서, 한 수 전보다 이번 수를 두는 내가 더 고수일 수 있고, 이번 수보다 다음 수를 두는 내가 더 고수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검토는 어쩌면 바둑보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일지도.
최근의 바둑마냥 인공지능으로 살아온 인생을 검토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검토가 필요 없는 완전한 인간이 된다(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니겠지만, 거의 버금간다.). 인간적인 인생이 비인간적인 무언가로 변모한다. 그것은 생이라 이름 붙일 수 없다. 인공지능 틀어놓은 바둑판마냥, 모두가 블루스팟만이 보이는, 가히 필연의 향연. 으엑, 이런 건 역시 생이라 할 수 없다. 역시 여기선 알파고보단 ‘인생나누기’가 좀 더 어울린다.
수많은 과거의 ‘나’들은 어떤 방향으로 힘을 썼을까? 그리고 연속적인 의지들은 필연적이었을까? 분명 그때의 나는 분명 그것들을 당연한 수순으로 여겼을 텐데. 나이를 먹은 탓인가, 인생을 나누어보니 이상하게 이 수순이 필연으로 뵈질 않는다. 인생에 이상한 응수가 너무 많다. 손 빼야 할 곳에 지저분하게 처리한 것도 많고, 반드시 가일수 했어야 할 곳에 손을 빼버린 것도 많다. 시간은 비가역적이라는 이 절대명제만 아니었어도, 당장 돌아가서 보수공사 했을 텐데. 검토하며 나아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인생은 어쨌거나 바둑과 닮아서 수를 물릴 수는 없다.
그래도 오늘은 만족해야지. 인생을 나눠보았으니까. 이다음 수는 좀 더 고수가 되어 둘 수 있다. 언젠가 더 나이 먹고 이 순간을 다시 나눠보면, 아이고 이건 받았어야지, 할 수도 있지만, 뭐 수는 물릴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가 힘써서 만들었고, 또, 지금의 ‘나’는 검토도 하며 힘쓰고 있으니까, 그다음 ‘나’는 좀 더 멋진 인간이 되어 있을 거다. 한 판의 바둑 속에서 내 실력은 늘 수 없지만, 하나의 인생에서 나는 고수가 될 수 있으니까.
즐거워서 웃음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