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의자
당신은 누구의 의자가 되었습니까?
# 2019-03-06, 4:30 AM
여느 때처럼,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Oil pooling 용 올리브유 20 cc를 입 안에 머금고 현관으로 나가 대문을 열고 조간신문을 집어와 자연의 심판대에 앉아 신문을 펼쳐 들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열불 나는 뉴스로 가득한 페이지들을 제목만 보고 급히 넘기다가 문화면에 와서 손과 눈이 멈추어 섰다.
한 시인이 낸 신간 시집에 대해 작가의 사진과 함께 큼지막하게, 비중 있게, 부럽게 다룬 기사였는데 그 기사의 타이틀이 나를 붙잡아 맨 것이다.
‘살면서 타인(他人)에게 의자가 되어준 이 얼마나 되랴?’
이 한마디는 새벽 5시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장산 기슭 어느 절에서 울리는 범종처럼 내 가슴에 '데에에앵~' 하는 강한 울림과 함께 잔잔한 파동으로 긴 여운을 남겼다.
그래서 아침 식탁에서 아내에게 이 기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이 시집 사 보아야겠으니 신문 버리지 말고 놔두시라요.” 하고 출근했다.
# 다음날 아침, 6:30 AM 식사 시간
일 하러 가는 남편 아침상 차려주고 앞에 앉은 아내가 친구로부터 카톡으로 받은 거라며 유튜브에 오른 뮤직비디오 두 편을 밥 먹으며 들어보라고 틀어준다.
첫곡은 클래식 연주곡인데 역시 클래식은 나와는 안 맞다.
두 번째 곡이 나오는 순간 내 귀는 그 곡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우리 부부가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보았던, 그래서 적극 추천하고픈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의 대표적 OST ‘어른(Grown Ups)’이라는 곡이 드라마 속 장면들과 함께 흘러나온다.
이 드라마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후 어린 나이에 사회로부터 받아온 냉대와 상처로, 자신을 길러준 병든 벙어리 할머니 모시고 밤낮으로 아르바이트해서 근근이 살아가야 하는 고달픈 현실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여주인공 아이유.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윗사람마저 아예 무시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왕싸가지 어린 알바생을 온갖 수모와 오해를 받아가며 돌봐주는 아저씨 직장상사 이선균.
결국 그 인간애에 감동받아 인간에 대한 신뢰와 감사를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눈물 나게 보여준 수작(秀作)이다.
비디오의 첫 장면은 주인공 이선균이 직장 동료들과 포장마차에서 한 잔 하면서 하는 말인데, 이 대사가 바로 이선균이 왜 그 아이를 미워할 수 없는지를 대변하는 가슴 울리는 명대사다.
“너희들은 걔 안 불쌍하냐?”
“뭐가 불쌍하노? 그 싸가지 없는 거!”
“경직된 인간들은 다 불쌍해. 살아온 날들을 말해주잖아.
상처받은 아이들은 너무 일찍 커버려. 그게 보여.
그래서 불쌍해.”
그리고 후반부에, 할머니가 자기 손녀에게 잘해준다는 직장상사 이선균의 안부를 물을 때 아이유가 울먹이며 수화(手話)로 하는 말.
"사람, 사람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게~~~~~"
하며 말을 잇지 못하는 그 절제된 대사가 상처받은 어린 영혼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눈물 나게 드러낸다.
가슴 시리도록 애련한 가사에, 스르르 눈을 감게 만드는 멜로디가, 더 이상 잘 부를 수 없을 만큼 잘 부른 Sondia의 노래와 어울려 또 한 번의 감동을 자아냈다.
「고단한 하루 끝에 떨구는 눈물/ 난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아플 만큼 아팠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한참 남은 건가 봐/ 이 넓은 세상에 혼자인 것처럼/ 아무도 내 맘을 보려 하지 않고/ 아무도~~」
음악이 끝난 후 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드라마에선 이선균이 바로 아이유의 의자였네. 그것도 아주 완벽한."
"그러네요."
그리곤 나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고, 나보다 생각과 감정의 전환이 훨씬 빠른 아내가 아직 감동의 여운에 잠겨있는 나를 화들짝 깨운다.
"지금껏 살아오는 동안 나의 의자가 되어 준 이는 누굴까?"
나는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연신 가리키며 뭘 그런 걸 고민하느냐는 표정으로 아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내는 피식 웃으며
"치~ 그런 건 내 입에서 저절로 나와야지 당신이 강요하면 안 되지. 오늘 생각 좀 해 봐야겠다."
"나 이거 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뭐 있노? 답은 딱 하나일 텐데.
나는 누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바로 '내 마누라!' 하고 답할 준비가 항상 되어있는데..
좀 섭섭하구먼.ㅎㅎ "
아내가 웃으며 받아친다.
"그런데 어쩌지? 그 의자가 벌써부터 찌그덕거리니 앞으로 내가 불안해서 어찌 앉겠소?"
최근 한 달 이상 건강이 안 좋아 하루하루 힘겹게 지내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풉, ㅎㅎ 동무 , 걱정 마시라우요 ! 내 곧 수리해서 딱 바라시해 놓을테니끼니. 두고 보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