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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Aug 10. 2022

삶06 어른의 역할

생각을 담은 그릇


# Scene 01 병원 7층 영상의학과      


밖이 계속 소란스럽다.

여자 환자의 거친 고함소리에 간간이 들리는 여직원의 응대 소리.

하마나 끝나나 하마나 끝나나 하고 참다가 도저히 더는 못 참고 방문을 열고 나갔다.


"아주머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여기 들어와 제게 말하시지요. 내 다 들어드릴 테니."     

고함지르는 사람을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와 의자를 내주고 마주 앉았다.


나이는 육십 대, 눈썹은 문신을 했고 아래위 속눈썹은 마스카라를 진하게 칠했다.

그녀의 지나온 삶의 흔적이 강하게 묻어나는 얼굴과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습한 기운은 

이 양반과 잘 못 붙었다가는 남자고 여자고 뼈도 못 추리겠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 과에 온 환자를 이렇게 화나게 만든 데 대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 과의 책임자로서 먼저 사과드립니다. 이제 감정 가라앉히시고 자초지종을 말씀해 보시지요."


그녀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토해낸 이야기의 요점은 다음과 같았다.     

1) 변실금 때문에 수술을 받았는데 요즈음도 약을 안 먹으면 전과 똑같이 변을 잘 못 참는다.

2) 그래서 오늘 항문 검사받으라고 해서 약을 먹었는데 검사받기 전까지 세 번이나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검사용 바지에 그만 대변을 지렸다.

3) 바지를 갈아입으려고 바지 하나 달라고 여직원에게 말했는데 여기에는 없으니 (한 층 위) 8층에 가서 달라하라 하더라. 이게 말이 되냐?


그러면서 환자는 여직원 이름을 들먹이며 가만 안 두겠단다.

일방적으로 환자 말만 들어서는 그동안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상황은 대충 집작이 되었다.


‘수술을 받았는데도 별반 달라진 게 없어 원장에 대한 원망이 잔뜩 쌓였는데, 오늘 변까지 지려 옷이 축축해 더 열받았는데, 직원이란 년이 빨리 가져다주지는 못할망정 나보고 가지러 가라니?! 에이 시펄~!’ 

하며 지금까지 쌓였던 불만을 애먼 직원에게 다 끌어 부은 것이겠지.


"환자분 말을 들어보니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화 날 만도 하네요. 다시 한 번 이 과를 대표해서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직원도 불러서 사과시키겠습니다. 하지만 이 점을 좀 이해해 주시지요.

그 직원은 방사선사입니다. 이 시간에는 각 촬영실 환자 때문에 정신없이 바쁩니다. 그 일은 자신이 할 일도 아닐뿐더러, 자신이 옷을 가지러 가면 검사받을 환자가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환자분 급한 사정은 모르고 그만 그리 응대한 모양이네요. 아직 어려서 그러니 한 번 너그럽게 봐주시지요."


“그런다고 사람을 그리 대해요? 난 용서 못 해요. 내 요년 가만두나 보자.”

그러고는 병원장에게 가서 따지겠다, 인터넷에 이 병원 올리겠다는 둥 온갖 지저분한 협박을 다 해댄다.


직원을 불렀다.

“내가 들어보니 네가 네 입장만 생각하고 환자 입장을 소홀히 했구나. 명백히 네가 잘 못 했으니 환자분께 정중히,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드려라.”


그랬더니 그 직원, 충분히 억울할 만한데 아주 쿨하게 나온다.

“예, 잘 알겠습니다. 환자분,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하며 깊숙이 고개 숙여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이쯤 되면 그만둬야 한다. 그러나 이 여자, 어린 게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더 몰아부친다. 참말로 어른답지 못하다. 그녀의 도가 넘은 행동에 내 속에서는 또다시 헐크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넌 이제 됐으니 나가봐라.”     

직원을 내보낸 후 내가 한마디 했다.


“직원이 그 정도 사과했으면 어른이 받아주는 아량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리다고 아무한테나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언어폭력도 심각한 폭력 중 하납니다. 요즈음 의료기관에서 폭력을 행사하면 어떤 처벌을 받는지 아시지요?”


그랬더니 그 여자, 내 가운에 새겨진 이름을 빤히 쳐다보면서 “원장님 이름이 박00네요.”라 한다. 


이제 나하고 한 판 뜨자 이거지?

드디어 내 인내심이 바닥이 나고 헐크의 옷 찢는 소리가 들렸다.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이럴 경우 "야이 썅!"이란 일갈부터 먼저 나왔을 터인데, 이번에는 '야이 썅!' 대신 양 눈에서 나오는 범상찮은 레이저빔과 목구멍에 울려나오는 강력한 저주파탄을 날렸다.


“내 이름요? 뭘 잘 모르시네. 이건 내 전임자 가운이고요. 자! 아예 내 명함을 드릴 테니 병원장한테 가서 따지든 인터넷에 올리든 마음대로 하시되 내 이름 석 자나 똑바로 알고 하세요.” 하며 명함을 한 장 건넸다.


그러자 그녀는 “알았어요!” 하고는 명함을 들고나간다.

이것으로 상황 끝. 

하지만 그 뒷맛은 썼다. 


'내가 이런 사람과 같은 세대의 어른이라니....'


     

# Scene 02 소란이 종료된 후     
 

환자 보러 왔다 갔다 하면서 보니 그 여직원, 접수대에 팔꿈치를 고고는 계속 풀 죽은 모습으로 심각한 표정으로 꾸부정하게 서 있다. 내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하영아, 오늘 기분 나빴제? 내, 네 마음 다 안다. 내가 너만 나무라서 더 섭섭했을 테고….

세상 살다 보면 별의별 일 다 당한다. 그런 일은 그냥 툭 털어버려라. 마~ 길 가다가 똥 밟았다~생각해라."


그러자 옆에 있던 여직원 둘과 함께 폭소가 터진다.


"생각을 한번 해봐라. 그런 기분 나쁜 일 가슴속에 품고 두고두고 기분 나빠하면 누가 더 손해고? 그 사람은 욕 실컷 했으니 속이라도 시원하겠지만 너는 욕먹은 것도 억울한데 기분까지 계속 나쁘면 너는 두 배로 손해 보는 거라. 그 사람은 너 기분 나빠지라고 욕했는데 그 의도대로 잘 따라주니 속이 더더욱 씨원~ 안 하겠나?

니가 뭐 한다고 그런 손해 볼 짓을 할 거고? 안 그렇나?"


"그렇네요, 교수님."


"그래, 기분 나쁜 감정은 빨리 털어버리는 거다. 그런데, 털어버리는 것은 좋은데 그걸로 끝나면 니가 얻는 게 없다. 잊기 전에 먼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너 자신을 한 번 돌아보는 것이다. ‘오늘 내가 무얼 잘 못 했지? 내가 고쳐야 할 점은 무어지?’ 하고 말이다."


"오늘 네가 잘 못 한 점이 무얼까? 그것은 너는 네 일에만 신경을 썼지 환자의 입장은 전혀 생각지 않은 점이다. ‘내가 어떡하면 저 환자에게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들었다면 네 머리 정도면 네가 직접 올라가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방법을 찾아냈을 거다. 내 말 틀렸냐?"


"맞아요, 제가 미처 그런 생각은 못 했어요."


"그래, 의료인의 역할이 무엇이겠냐? 우리는 환자를 도와주는 사람들이다. 너희들, 그 점을 명심하며 살아라.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내가 어떻게 하면 저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환자와 싸울 일이 뭐 있겠냐? 안 그렇나?"


"넵, 잘 알겠습니다, 교수님."


"어떤 사건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너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고쳐 나가면 오늘은 그저 '똥 밟은 재수 없는 날' 이 아니라 너에게 또 하나의 깨달음을 준 귀한 날로 기억되지 않겠니? 이런 날들이 하루하루 쌓여서 사람은 성숙해지고 어른이 되어가는 거란다. 알겠느뇨?"


다들 열심히 듣고 있다가 이구동성으로 “예”라 답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우리 과 직원들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게 되었다. 

안에는 8층 직원들이 미리 타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하영이는 오늘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야!”

“왜요?”

“욕을 많이 먹어서.”


다들 까르르하고 웃는다.


“그런데 그 환자, 너한테 욕 값은 주고 가더나?”

“???.....   아니요.”

“아이고, 싸가지 없제. 그만치 욕을 들어줬으면 욕 값은 내고 가야지!”


또 까르르.


“그 대신 오늘 내가 커피 한 잔 살게. 다들 밥 먹고 카페에서 보자.”     


밥 먹고 카페에 모였다. 6명쯤 된다.

내가 결재하려니 기사 실장이 나서서 자기가 사겠단다.


“아니, 실장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동안 교수님이 사셨으니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다들 모여 차 마시며 즐겁게 떠들어댔다.

하영이의 얼굴이 한결 밝아져 기분이 좋았다.


# Scene 03 귀갓길
    

광안대교에 진입하며 양쪽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생각했다.


‘이 사회에서 어른의 역할이 무얼까?’


책이나 쓰고 강의나 하며 살아가려던 나에게 어느 날,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제자의 간청으로 근무하게 된 이 병원에서 내가 제일 나이가 많다.


병원장은 나보다 10살 아래, 나머지 원장들은 내 딸과 거의 동갑내기들. 게다가 모두 다 내 제자들이다 보니 그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교수님, 교수님" 하며 깍듯이 받들어 모신다. 그러니 대부분 20/30대 여성인 직원들에겐 내가 얼마나 어려운 상대이겠는가!


첫 출근 하는 날, 정년퇴직 후 염색을 안 해 산신령처럼 된 하얀 눈썹과 머리카락을 세치커버 마스카라로 위장을 하고 나갔다. 그리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밥 사는 일이었다.


한국사람들만큼 밥에 진심인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들과 친해지려면 무조건 밥부터 먹어야 한다. 하여, 출근한 지 사흘 만에 7층 8층 직원들 불러다 회식하고, 2주 후에는 제1 병원 제2 병원 영상의학과 직원들과 합동 회식을 했다.


병원 식당에서 밥 먹을 때는 의사들만의 공간인 위층에 가지 않고 아래층에서 여느 직원들과 섞여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고 한 번씩 카페에서 차도 사주며 어울렸다.


이렇게 한 달이 지났다.

그랬더니, 출근길이나 복도에서나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다들 얼마나 반갑게 인사를 하는지! 

이제 다들 나를 어려워하기보다는 친근하게 느끼는 것 같다.


이렇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가며, 나든이가 젊은이의 눈높이로 내려만 가면 얼마든지 그들과 친구처럼 지낼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 일을 겪으며 젊은이들의 상처받은 마음, 잘 쓰다듬어 주고 안아주면 나든이의 충고도 이렇게 잘 먹혀들어 가는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어른스런 어른으로 늙어갈지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귀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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