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보조기 I 11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우물 Mar 14. 2022

박살난 기타

장편소설

나영은 장안사에 들어간 지 3개월 만에 하산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더 이상 거기에 있을 이유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해 겨울, 그는 무사히 본과로 올라갔다.    

 

1974년 3월, 

본과에 올라와 수업을 들어보니 예과와는 차원이 다른 학문이었다.

예과 때는 그래도 나영이 좋아하는 영어, 독일어 등 문과 영역의 과목들도 다수 있어 흥미도 있고 학점 따기도 쉬웠는데 본과에 올라오니 공부해야 할 내용이나 양이 예과와는 아예 비교가 안 된다.      


배우는 과목이 워낙 많은 데다 일단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것들은 모조리 암기부터 해야 했다. 

그런데 이 중에서도 제일 먼저 그를 기다리고 있는 학문은 암기 외에는 아무것도 요하지 않는 해부학이었다.  

나영이 예과에서 낙제한 것도 동물의 해부학적 구조를 다룬 비교해부학이었는지라 그놈의 ‘해’ 자만 들어가도 알레르기가 있는 데 또다시 해부학이 맨 먼저 나타나니 한숨부터 나왔다.     


그는 원래 원리를 따지고, 원인을 추적하고, 질문을 던진 후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기는데 이놈의 과목은 오로지 외우는 것밖에 없다. 

제일 먼저 나오는 골학(骨學)에서는 외워야 할 뼈다귀 이름이 200개가 넘고, 다음으로 등장하는 근학(筋學)은 300개가 넘고, 그 외 각종 장기와 이들에 분포하는 혈관 및 신경까지 합하면 외울 이름이 정확히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사람 이름조차도 외우기 힘들어 처음 만나 인사하고 돌아서면 까먹는 나영인지라 앉으나 서나, 감으나 뜨나, 염불 외우듯 주문 외우듯 이름만 중얼거리며 날밤을 샜다.

드디어 시험날이 왔다. 시험을 치르고 난 나영은 처칠의 말이 절절이 와닿았다.     


"내가, 나에게 한없이 적대적인 그 고약한 ’시험’이라는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이제 갓 12번째 생일을 지난 때였다. 이 시험이란 놈들은 나에게는 커다란 시련이었다. 출제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과목들은 거의 예외 없이 내가 꿈에도 보기 싫어하는 그런 것들뿐이었다. 나는 역사, 시, 그리고 에세이 쓰기에 대해 시험을 치르고 싶었는데, 출제자들은 편파적으로 라틴어와 수학만 문제로 냈고 이러한 그들의 뜻은 누구도 거슬릴 수 없었으며 그들이 낸 문제에 대해 나는 거의 예외 없이 무슨 답을 써야 할지 몰랐다.“     


나영이 꼭 그런 심정이었다. 

“나는 문제 해결형 시험을 치르고 싶었는데 시험에 나오는 문제란 것들이 모조리 수준 낮은 암기형 문제뿐이라 열이 받혀 문제지를 다 읽어보기도 싫었다.”      


이리하여 나영은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본과 1학년 1학기 기말고사 중 ‘해부학’이란 고약한 과목 하나에서 장렬히 전사(戰死)하고 말았다. 낙제 전과 2범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나영은, 인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교장 선생님 덕분에 입학시험에서 거의 빵점을 먹고도 그 유명한 ‘Harrow school’에 입학할 수 있었던 처칠이 한없이 부러웠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내가 또다시 낙제했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면 얼마나 상심해하시겠는가!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가벼운 뇌졸중까지 앓은 연로하신 아버지가 이 충격을 잘 견뎌낼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나영은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 싶어 낙제한 사실을 감추기로 했다.


하지만, 방법이 문제였다.

완벽주의의 프로토타입 같은 아버지를 속이려면 아버지보다 더 완벽해야 하고 그에 걸맞은 시나리오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그때, 나영의 머리에 번갯불처럼 번쩍 떠오른 생각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고교 졸업 후 길거리에서 당한 네다바이 사건이었다.

'그래, 그놈들 시나리오의 원리만 알면 아버지도 충분히 속일 수 있을거야!'   

그날부터 나영은 그들의 시나리오 분석작업에 들어갔다.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사기극에는 시나리오 하나면 족하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는 길거리 헌팅에는 시나리오 하나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네다바이 설계자는 과연 몇 개의 시나리오를 만들어 주었을까?'


나영은 그날의 필름을 몇 번이고 거꾸로 돌려가며 그들의 범죄 수법을 재구성해 보고 그 시나리오의 설계자가 되어 아버지를 속일 작전을 짰다.   
  

작전 1단계: 친구들 입단속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보안유지가 생명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누설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모조리 공범자로 만드는 것이 최고의 상책이다.」


이를 위해 나영은 그와 가장 가까운 친구 몇 명을 불러 모아 아버지 상태를 설명한 후, 그들과 함께 대책을 모의하고 부모님께는 절대 비밀로 할 것을 다짐받았다.  


작전 2단계가짜 성적표 만들기

나영의 아버지는 평생을 공직자로 지내면서 매일 같이 공문서를 다루며 살아온 사람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가짜 성적표를 만들어 보인다 하더라도 그런 아버지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보내는 진짜 성적표 발송은 어떻게 막을 것이며 무슨 수로 중간에서 가로챌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나영은 며칠 동안 온갖 머리를 다 굴리다 또다시 네다바이 사건에서 그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래, 그들의 시나리오는 두 개가 아니라 하나였어! 대상이 장애인이란 특수한 상황도 그 시나리오 하나에 순발력만 발휘하면 되었어. 그러니 이 문제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아주 단순하게 접근하면 돼.」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학교에서 진짜 성적표를 보내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성적표는 누가 만들고 누가 발송하노? 그야 교학과 직원이지. 그 교학과 직원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뇨? 교수밖에 없네!」


나영은 머릿속으로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려보았다.

「교수가, 자존심 다 내려놓고, 교학과 직원을 찾아가  딱 한 번만 사정 좀 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서 만약 나중에 문제가 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면 직원은 아주 독한 사람 아닌 다음에는 마지못한 척 그 부탁을 들어준다.」  


이제는 결행할 차례. 

나영은 E4 지도교수인 김 교수를 찾아갔다.

그는 교수님께 아버지의 몸 상태를 과장되게 설명한 후, 자식이 또다시 낙제한 사실을 알게 되면 아버지가 쇼크로 쓰러지게 될 것이라며 한 번만 도와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교수를 보고 범죄에 가담해 달라니! 참으로 무리한 부탁인 줄 알았지만 나영에게는 그런 부탁을 할 만큼 가까운 교수가 그분 말고는 없기에 할 수 없었다.


당시 심장내과 학계의 떠오르는 샛별이라 불렸던 김 교수는 실력만큼이나 인물도 좋아 몸집으로나 생김새로나 배우 ‘남궁원’을 쏙 빼닮은 미남이었다. 그는 평소에 장애인인 나영을 안쓰럽게 여겼고, 입단하자마자 간판스타가 되어 E4의 이름을 대학가에 드높인 그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다.     


나영이 노린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내가 부탁하면 들어주시겠지.」

 나영의 황당하고도 대담한 부탁에 김 교수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알았다.’ 한마디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이제 내 할 일은 다 했으니 하늘의 명을 기다릴 수밖에.’라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교수님과 직원이 어떻게 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인 나영은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때가 되어 학교에서 우편물이 왔다.


"편지요." 하는 우체부 소리에 나영이 잽싸게 아파트 문을 열고 나가 받아 보니 학교에서 보낸 봉투다.

나영은 두근반세근반 가슴을 쿵쿵거리며 그 봉투를 들고 아버지께 갖다 드렸다. 

아버지는 봉투를 뜯고 성적표를 읽어보고는 ‘수고했다.' 하고는 돌려주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대학에서 만든 공식문서였고, 직인이 찍혔고, 봉투도 우표도 모두 진짜였다.      

이리하여, 아버지를 상대로 한 나영의 사기극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2학기가 시작되자 나영은 여느 때나 다름없이 아침이면 학교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다가 저녁이면 돌아왔다.    

그런 기만의 생활이 일주일쯤 지속된 어느 날, 외출 후 집에 돌아와 방문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영은 전율을 느꼈다.      


방바닥에 기타의 잔해가 어지럽게 흩어져있는데 이건 기타가 넘어져 깨진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 기타의 지판을 잡고 방바닥에 내리쳐 박살을 낸 처참한 광경이었다. 나영은 직감적으로 거짓말이 들통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시 안방으로 들어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이실직고하고 아버지가 걱정되어 그랬다며 눈물로 사죄했다. 

       

방에 돌아온 나영은 “기어코, 이 친구가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구나!”라며 부르르 떨었다.     

용의자는 단 한 명. 윤동이었다.       


나영과 가장 친했던 윤동은 친구들과의 모의 과정 때 하필이면 지방에 내려가 있었다. 

나영은 모든 모의를 마친 후 마지막 단도리를 위해 그를 만나러 거제도까지 내려가서 그때까지의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그러자 윤동은 "야, 어떻게 부모를 속일 수 있냐? 내 지금 바로 아버지께 전화해야겠다."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는 그를 겨우 말린 후 나영이 차갑게 말했다.

 “만약 네가 그리하면 나하고는 영원히 끝인 줄 알아라.” 

 나영은 부산으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저 친구가 지금은 저렇게 방방 떠도, 이건 어디까지나 나와 아버지와의 문제인 만큼 지가 뭘 어쩌겠는가?’라며 안심했다.


하지만 윤동에겐 우정보다 도리가 앞선 모양이었다.

3년 전의 네다바이꾼들이 완벽한 시나리오에도 불구하고 생각지 못한 변수로 인해 1주일 만에 경찰에 붙들렸던 것처럼, 나영의 그 대단한 계획도 친구 하나 잘 못 믿었다가 1주일 만에 사달이 나고 말았다.


나영은 모든 걸 잃은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신임은 기타와 함께 박살이 나고,  고1 때부터 빛과 그림자처럼 지내던 절친과는 절교하게 되고, 이젠 사랑마저 잃게 생겼으니.....     

그런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이전 10화 꿈길과 무덤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