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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조기 I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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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Mar 07. 2022

꿈길과 무덤길

장편소설

또다시 촛불이 고개를 숙이자 결심이 선 듯 나영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내려가시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듯한 얼굴로 점퍼를 걸쳐 입고 방문을 열고 나와 옷깃을 세웠다.

문희가 따라 나오자 나영은 플래시를 켜고 산문(山門)을 나섰다. 

캄캄한 산길을 플래시 불빛 하나에 의지하여 내려오자니 아무래도 걸음걸이가 불안했다.     

나영은 외투 호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있는 그녀의 왼팔을 살며시 잡고 걸었다.

그녀와 어쭙잖은 폼으로나마 팔짱을 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두꺼운 외투 너머로 따뜻한 그녀의 체온이 전해오는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캄캄한 산길에 비치느니 아스라한 겨울 달빛이요

적막한 산길에 들리느니 졸졸 거리는 개울물 소리뿐.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오히려 크게 들렸다.

징검다리 건너듯 한 발 한 발 조심조심 걷다가, 피곤하면 바위에 앉아 달빛 젖은 물길을 바라보며 소곤거리다가, 또 일어나 걷다가….     

마치 구름 위의 꿈길을 거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언제 내려왔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정말 눈 깜박할 사이에, 신작로까지 오고 말았다.     

'아니, 벌써?'


둘은 길가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버스야 제발 오지 말아라‘ 하는 마음과 ’그래도 집에는 돌려보내야지‘ 하는 마음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고 있는 사이, 털털거리며 가까워져 오는 눈치 없는 버스의 불빛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버스가 앞에 섰다. 안을 보니 앉을자리가 없다. 저런 버스를 타고, 서서 부산까지 갈 그녀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당장 따라 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육 개월 동안의 유배 생활을 자원하여 온 몸이다. 절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두 달. 비록 잠시 동안이라지만 스스로와의 약속을 저버릴 순 없었다.   


 “자, 그럼 조심해 내려가세요.” 


그녀가 버스에 올라타자 문이 닫히고 차는 출발했다.

멀어져 가는 버스를 바라보며 나영은 어금니를 굳게 다물었다.


문희 혼자 떠나보내고 난 나영이 다시 캄캄한 산길에 들어서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니, 내가 저 길을 어떻게 내려왔지? 이제 어떻게 올라가지?'

내리막길보다 힘든 오르막길이다.

내려올 땐 두 사람이었지만 올라갈 땐 혼자다.

내려올 땐 한 손을 의지하고 왔지만 올라갈 땐 잡을 팔이 없다.  


'에그, 내가 미쳤지 미쳤어! 참말로 사서 고생이네. 

아이고 이 놈아, 니가 무슨 독립군이라도 되나? 그렇게 결연한 의지를 다지고 앉았게?'   


적막 속의 캄캄한 산길, 무언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아 무서웠다. 

내려올 땐 솜사탕 같던 길이 올라갈 땐 거친 자갈마당으로 변했다.

내려올 땐 그렇게나 짧던 길이 올라갈 땐  왜 그렇게 먼지!

다리는 뻐근하게 굳어가고 숨길은 점점 거칠어져 갔다. 

중간에 좀 쉬었다 가고 싶어도 외롭고 무서워서 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찌어찌 거의 다 왔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불현듯 잊고 있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무덤'

그렇다. 그 모퉁이에는 무덤이 하나 있었다.

이제 바로 그 앞을 지나가야 한다 생각하니 갑자기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아~~ 이 일을 어쩌누?'


그는 잠시 서서 생각에 잠겼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나영은 코너를 돌자마자 무덤 앞에 다가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올렸다.

“이 겨울밤에 홀로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육신을 입은 이 몸, 동무해 드릴 수 없음을 양해하시고 

오늘밤 평안히 잠드소서. 그럼 저는 이제 그만 ~.” 하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소복에 산발 머리를 하고 입가에 피를 묻힌 귀신의 형상이 "탁" 하고 뒷덜미를 낚아채는 듯한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그야말로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졌다.


이럴 땐 삼십육계(三十六計)가 최고다. 무덤에서 산문까지는 약 100m. 

'뛰는 게 가능할까?'

순간, 나영은 고교 입학 시 100m 달리기 체력장 시험을 치를 때 기본점수라도 받아볼 양으로 창피를 무릅쓰고 저는 다리로 온 힘을 다해 뛰었던 생각이 떠오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보조기를 철커덕 거리며 총알처럼 내달렸다. 장애인인 나영이 초인적 힘을 발휘하여 뛰어본 네 번의 뜀박질 중 세 번째가 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드디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문 안으로 뛰어들자 대웅전이 눈에 들어왔고 그제야 '귀신도 부처님 앞에서야 뭘 어쩌겠는가?'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영의 두 손과 입술이 저절로 모아지고 저절로 움직였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절밥 두 달 먹은 효과가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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