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겨울의 산사(山寺)는 해가 빨리 진다.
나영이 문희와 함께 절을 한 바퀴 둘러보며 안내를 마치고 나자 벌써 주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식사 때가 되자 밥 보살은 평소와는 달리 2인분의 밥상을 차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방에 넣어주었다.
점심을 굶었는지, 문희는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절밥을 맛있게 먹고 밥상을 부엌까지 내다 놓았다.
이제 촛불 아래 단둘이 남았다.
나영은 이런 일이 처음인지라 뭔지 모르게 어색했고 문희 또한 매한가지였다.
그런 분위기를 깬 것은 문희였다.
그녀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본 후, 방 식지 말라고 덮어 놓은 나영의 이불 홑청에 덧대 놓은 타월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영 씨, 이 타월 좀 갈아야겠는데요. 혹시 여분 가져온 것 있어요?"
절에 올라온 지 두 달이나 지난 터라 타월은 어느새 때가 좀 묻어있었다.
어머니가 여분으로 챙겨준 새 타월과 실·바늘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자 그녀는 헌 타월을 뜯어낸 후 새것을 덧대고는 천천히 바느질하기 시작했다.
군불로 따끈해진 구들목, 한 이불속에 다리를 집어넣고 촛불 아래 바느질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자니 이 밤이 다하도록 그렇게 앉아있고 싶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어요?”
그 답이 두려워 끝까지 묻고 싶지 않았던 그 말을 나영은 기어이 내뱉고야 말았다.
“전과(轉科) 문제로 골치가 아파 만사 다 잊고 머리도 좀 식힐 겸 해서 그냥 불쑥 시외버스 잡아타고 왔어요.”
예상 밖의 대답에 나영은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삼켰지만 한편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 문제밖에 없을까? 과연 그런 문제로 이 시간에 부산에서 버스 타고 택시 타고 이 산중까지 찾아왔을까? 한번 피어오른 의구심은 나영이 고교 시절 겪었던, 아직 아물지 않은 정신적 트라우마까지 스멀스멀 기어 나오게 만들었다. '혹시, 이 집안에서도?'
하지만 그딴 것 무시하기로 했다. 그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지금 느끼는 이 평안을 이 순간만큼은 그 무엇에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시름 다 놓아버린 듯했다.
두 사람은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깊어만 가는 밤의 눈총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함께하는 그 시공간을 음미하는데 충실했다. 어느덧 반 이상 타버린 초의 심지가 한 번씩 고개를 떨어뜨릴 때마다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흔들렸고 그 그림자를 따라 나영의 마음도 흔들렸다.
'여기서 이대로 밤을 새우고 내일 아침에 내려보내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데리고 나가 차 태워 보내야 하나?
지금 나간다면 이 캄캄한 산길을 어떻게 내려갈 것이며, 좌천까지 간다 하더라도 부산 가는 막차가 남아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이 금녀의 방에서 함께 밤을 지새운다면 내일 아침 이곳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분명, 새벽을 깨우는 탑돌이 스님의 목탁 소리는 평소의 강약괴 리듬감을 상실한 채 어지러이 허공을 떠돌 것이고, 나를 쳐다보는 스님들이나 보살님의 눈길은 예전 같지않을 것이며, 어쩌면 주지 스님의 입에서 '당장, 방 빼!'란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나영의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데 무심한 촛불은 꼬박꼬박 조불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