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나영이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1년 전이었다.
봄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3월 초, 오전 수업을 마친 후 나영은 고교 1학년 때부터 절친으로 지내던 윤동과 함께 학교 아래에 있는 에뜨랑제 다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좌석에 앉아 있던 한 여학생이 일어서며 “형!” 하며 친구를 반겼다.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 윤동은 같은 서클 신입생이라며 나영에게 그녀를 소개했고 인사가 끝난 후 그녀는 원래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윤동은 자기가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를 정식으로 소개하겠다며 나영을 서면에 있는 한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취업을 한 직장여성으로서 키도 크고 노숙하여 마치 누나처럼 보였고 커다란 몸집만큼이나 마음도 넉넉해 보였다.
저녁 식사 후 그녀는 생맥주를 한 잔 사겠다며 인근의 맥주 홀로 그들을 데리고 갔다.
당시 학생들에게 생맥주는 최고의 술이었다. 병맥주는 비싸서 아예 먹을 생각도 못 하던 시절, 생맥주 한 잔 마시는 날이면 ‘목구멍 때 벗기는 날’이라 했고 한 잔 가지고 한 30분은 끌어주어야 술 사는 사람 마음을 가볍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런 시절, 친구의 여친이 그들에게 생맥주를 한잔 사겠다는 것은 돈 버는 그녀가 돈만 쓰고 다니는 가난한 대학생들을 위해 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윤동과 그의 여친은 익숙한 듯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영을 영광도서 옆에 있는 ‘오비 베어’라는 맥주집으로 안내했다. 이 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큰 맥주홀은 처음이었다.
웨이터의 안내로 테이블을 잡고, 윤동과 그녀가 메뉴판을 보며 술과 안주를 시키고, 신청곡 리퀘스트 용지를 부탁하고 하는 사이 나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고 큰 홀에는 은은한 조명과 함께 스포트 라이트를 사방으로 뿌려대는 천장에 매달린 두 개의 은색구(銀色球)가 무드를 더했고, 한쪽 구석에는 뮤직박스가 있었다.
한창 음악에 빠져있던 나영의 시선은 자연스레 뮤직 박스로 향했고 그 속에 앉아 있는 DJ를 유심히 스캔했다.
뭔가 눈에 익은 듯한 얼굴인 것 같았지만 거리가 있어 확실친 않았다.
분명히 한 번쯤 본 모습인데, 어디서 봤지?
500cc짜리 커다란 생맥주와 안주가 나오자 세 사람은 ‘건배’를 외치며 한잔 쭉 들이킨 후, 친구의 신청곡을 감상하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는 사이, 뮤직 박스에 앉아 있던 DJ가 쪽문을 열고 나와 나영의 테이블 쪽으로 걸어왔다. 점점 다가오는 DJ의 모습을 본 나영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디서 본 듯한 그녀는 몇 시간 전 학교 밑 에뜨랑제 다방에서 만났던 윤동의 서클 후배였던 것이다.
그녀는 리퀘스트 용지에 적힌 윤동의 이름을 보고, 신청곡을 틀어주고 난 후 릴 테이프(rill tape)를 걸어 놓고 그들에게 인사하러 나온 참이었다.
나영이 놀란 이유는 그녀의 외모와 DJ라는 직업이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하얀 맨 얼굴에다 양 갈래로 딴 머리까지, 누가 봐도 고딩인 외모의 소유자가 저녁에 맥주홀에서 DJ를 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사실에 나영의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나야말로 음악이라면 한가닥 하는 사람인데, 이런 나도 DJ는 감히 생각도 못 해봤는데,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학생이 대중음악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길래 이런 곳에서 DJ를 다 한단 말인가?'
윤동의 옆에는 그의 파트너가 앉아있는지라 그녀는 자연스레 나영의 옆에 앉게 되었고 음악이라는 공통 고리로 엮인 두 사람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덕분에, 본인의 고유 근무지를 이탈하고 직무를 유기한 그녀는 테이블을 스쳐 지나가는 웨이터들로부터 몇 번이나 눈 화살을 맞아야 했다.
그들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녀는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Rinser Luise)와 한국 작가 전혜린의 작품과 정신세계를 논했고 한편으로는 그녀가 즐겨 찾는 재래시장의 활기찬 인간 에너지에 대해 들려주었는데 그 모든 것이 나영에게는 낯설고 신선했다. 만나면 반가웠고, 즐거웠고, 헤어질 땐 아쉬웠다. 그렇게 9개월쯤 지난 그해 겨울, 유급을 하게 된 나영은 창피한 나머지 한동안 연락조차 할 수 없었다.
장안사로 들어가기로 결정된 후, 나영은 그녀를 송도 해변가에 있는 ‘총각집’이란 곳으로 불러내어 자신이 낙제한 사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했다.
“문희 씨, 미안합니다. 정말 면목이 없네요. 나 역시 너무 충격이 커 마음도 가라앉힐 겸 반성도 할 겸 해서, 장안사에 올라가 한 육 개월 정도 묵을 예정이니 그동안 서로 헤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양복 재킷의 깃에 달고 다니던 ‘뱃지’를 풀어 건넸다.
그것은 대부의대에 함께 입학한 동래고 47회 동기생 8명이 기념으로 만들어 달고 다니던 것으로 나영이 가장 아끼는 물건 중 하나였다.
“그동안 나 보고 싶으면 이 뱃지를 보아주세요.”
S 라인을 그리는 송도 해안선 중 바닷가 쪽으로 툭 튀어나온 곡각 지점에 세워진 그 술집은 삼 면이 유리로 되어있어 마치 파도가 발목을 넘실대는 것 같은 착각을 유발하는 분위기 있는 집이었다. 하지만 이런 집 분위기와는 상반되게 그들 사이에는 무겁고 침울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영은 자괴감이 들었다. '한 사람은 장학생, 한 사람은 낙제생. 어쩌다 내가 이런 신세가 되었을까? '
드디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영 씨, 나 이해해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은 실수할 수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만약 같은 실수를 또다시 반복한다면 그때는...” 하며 고개를 떨구았다.
그렇게 떠나온 나영이었다.
그런데 지금, 장안사에 있는 자신의 눈앞에 그녀가 서 있다.
"오랜만이네요."
절제된 그 한마디 너머로 수많은 말들이 강물처럼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