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어느 날 문득 나영은 절에까지 들어와서 낙제한 과목 책을 들고 앉은 자신이 우스워졌다.
'어차피 2학기 들어가면 이놈 붙들고 또다시 지겹도록 공부해야 할 판인데, 내 인생에 단 한 번 주어진 이 황금 같은 시간에 내가 지금 무슨 청승을 떨고 있는 걸까?'
그때부터 그는 꼴도 보기 싫은 비교해부학 책 대신, 아버지께 부탁하여 인문학 책을 가져다 읽기 시작했고, 그런 한편으로는 절 밖으로 슬슬 마실도 다니기 시작했다.
어느 날 오후, 길을 따라 산허리를 돌아 올라가는데 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버드나무집’이란 자그만 팻말을 세워둔 민가 한 채를 발견하였다. 호기심에 마당으로 들어가 주인장을 불러 물어보았더니 부업 삼아 관광객이나 등산객을 상대로 밥도 팔고 술도 파는 집이란다.
'아이고, 잘됐네. 안 그래도 슬슬 속세가 그리워지던 차에 잠시나마 절 밖에 나와 술까지 한잔 걸칠 곳이 있다니!'
다음 날 저녁 식사 후 나영은 플래시를 들고 그 집을 찾아가 손님용으로 제공하는 문간방에 들어가 막걸리 한 주전자에 묵 한 접시를 시켰다. 잠시 후. 주인 아줌마가 차려온 소박한 곡차(穀茶) 소반을 앞에 두고 홀로 앉아 막걸리잔을 기울이고 있자니 불현듯 그리움이 밀려왔다.
졸지에 예기치 않게 헤어져 떠나온 보고픈 이, 그리고 친한 친구들…….
나영은 주인에게 편지지와 필기구를 하나 가져다 달래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이제 나영에게는 전에 없던 낙이 하나 생겼다.
가물거리는 호롱불 아래서 그리운 이들에게 편지 쓰는 즐거움과 답장을 기다리는 설레임.
편지를 보낸 날로부터 일주일 후부터는 10시쯤이면 계곡에 나가 앉아 저 멀리 돌아오는 길모퉁이를 바라보며 우체부를 기다리는 것이 버릇이 되었고 그러고 있는 자신이 마치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기다리는 산골 소년이라도 된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커다란 우편물 가방을 어깨에 두른 채 자전거를 끌고 힘겹게 올라오는 우체부가 눈에 들어오면 나영은 쏜살같이 달려가(?) 자신에게 온 편지가 있는지 확인했다.
손에 편지가 쥐어졌을 때 느끼는 행복감!
그것은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희락과는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었고, 편지가 없을 때 오는 실망감 또한 자연이 줄 수 없는 아픔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점심 먹고 책 좀 보다가, 절 주변을 걷다가, 계곡에 나가 바위에 앉아 혼자 도 닦고 앉았는데, 모퉁이를 돌아 올라오는 택시가 한 대 보였다. 해를 보아하니 오후 4시는 됨직했다.
'아니, 이 늦은 시각에 웬 보살님이?'
절에 택시가 올라오는 것도 드문 일이었지만 오후 늦은 시간에 택시가 올라오는 것은 처음인지라 호기심이 동한 나영은 차가 눈앞을 지나갈 때 유심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안에 탄 사람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로부터 한 오 분쯤 지나 이제 슬슬 방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절 쪽으로 올라갔던 택시가 다시 내려오면서 나영의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스쳐 지나간 잔영이 슬로비디오처럼 망막 위에 펼쳐지다가 그중 한 커트에서 정지했고 나영은 양팔을 흔들며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스토오~ㅂ!"
그러자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내려가던 택시가 잠시 멈춰 섰다가 다시 내려갔다.
뽀얀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면서 그 속에 서 있는 사람의 희미한 윤곽이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하자 나영의 두 눈동자로 그녀의 얼굴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너무나 보고 싶었던,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얼굴이 기별도 없이 눈앞에 나타나자 나영은 마치 신기루를 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