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화려한 대학 생활을 즐긴 나영은 2학년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자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그중에서도 자신의 적성과 가장 맞지 않는 ‘비교해부학’ 이란 과목이 제일 찝찝했다.
날이 갈수록 불안감이 더해가자 나영은 생각했다.
「80명 정원에, 낙제해서 본과에 못 올라간 선배들까지 합하면 88명. 7-8 명 낙제시킨다 보고, 넉넉잡고 끝에서 10명 안에만 안 들어가면 된다.」
나영은 평소에 '쟤는 왜 저래 비리비리해?' 내지는 '애가 왜 저래 쪼다 같냐?'라며 우습게 보았던 급우들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래도 그렇지, 내가 좀 놀았기로서니 쟤보다야 못하겠냐?' 하며 자위했고 ‘에이,입학할 때 3등으로 들어온 내가 낙제라니 말이 되나?’라며 불안한 마음을 억눌렀다.
드디어 미 학점자 명단이 적힌 방(榜)이 나붙던 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벽보를 바라보던 나영의 머리에는 '쾅!' 하는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고 눈앞은 캄캄해졌다.
비교해부학 한 과목에서 ‘F’ 학점. 이 말은 곧 낙제라는 말.
이 말은 곧 예과 2학년을 1년 더 해야 한다는 말씀.
'항상 우등생으로 살아온 내가 낙제생이라니! 이거 실화 맞나?'
나영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런 자신이 도무지 용납이 안 되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당분간 집을 떠나 혼자 있고 싶습니다. 손 닿는 곳 중에 한 6개월 정도 머물만한 조용한 절 같은 곳 어디 없겠습니까?”
이렇게 하여 나영은 죄인 된 몸을 스스로 절간에 유배시켰고, 며칠 후 아버지를 따라간 유배지는 기장에 있는 ‘장안사’라는 오래된 조그만 절이었다.
사찰의 구조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예불을 드리는 본당(本堂, 대웅전), 흔히 요사채로 불리는 요사(寮舍), 그리고 암자(庵子)로 나뉠 수 있다. 암자란, 큰 절의 경우 그에 소속된 작은 절들(말사, 末寺)을 말하고 작은 절은 대개 그 절이 있는 산 중턱에 지어진 조그만 건물(들)로 이루어지는데,1970년대 당시에는 고등고시 준비하는 사람들이 절에 들어와 골 싸매고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이 거주하던 곳이 바로 암자다.
장애인인 나영으로서는 혼자서 산 중턱에 있는 암자에 오르내리는 것도, 혼자 밥해 먹고 빨래해가며 생활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요사채에 머물며 절에서 해 주는 밥 받아먹고 생활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지만 요사채는 스님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서 외부인은 일절 들이지 않았다.하지만, 나영은 요사체에 머무르게 되었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그의 아버지였다.
장안사는 신라 문무왕 때인 67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쌍계사라 부르다가 809년 장안사로 고쳐 불렀고, 1592년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탄 후 1987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중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1950년대가 되자 장안사는 원효대사가 세우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유서 깊은 사찰이라는 명성이 민망할 정도로 대웅전의 단청(丹靑)은 퇴색할 대로 퇴색하였다.
하지만 사찰의 재정이 궁핍하여 단청을 새로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나라에 몇 번 탄원을 넣었지만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나라가 그런데까지 도와줄 여력은 없었다. 그러던 중 나영의 아버지가 동래군수로 부임하였다. 그는 관내(官內)의 장안사를 순시할 때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저렇게 낡고 볼품없이 스러져가다니!' 하며 안타까워하였다.
군수로 부임한 지 5년이 되던 1965년, 한 군수는 군 예산 300만 원을 들여 장안사의 대웅전 단청을 새로 칠하게 해 주었다. 당시 전국 1백39개 군 중에서 다섯 번째로 가난했던 동래군은 '기장미역' 팔아 거둬들인 세금으로 세수(稅收)의 50% 이상을 충당해야 했고 한해 예산이라야 고작 3,800만 원에 불과했다. 그중 300만 원이란 거금을 들여 사찰의 단층칠에 쓴다는 것은 그야말로 통 큰 결단이 아닐 수 없었고, 그 덕분에 장안사는 국가도 못 해 주던 숙원 사업을 한 군수의 도움으로 이루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세월은 칠 년이나 흘렀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군수도 아니다. 하지만 그 당시 그가 장안사에 끼친 은공은 장안사로 하여금 몸 불편한 자식을 당분간 요사채에 머무르게 해 달라는 한 군수의 소박한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만들고도 남았다.
이제 생후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나 절간에 덩그러니 홀로 남게 된 나영은 자신을 주지 스님께 인계하고 돌아서 가는 아버지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자 왠지 눈물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