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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조기 I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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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Feb 26. 2022

산거희락(山居喜樂)

장편소설

아버지와 헤어진 나영은 요사채 1호를 배정받았다. 

대웅전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자그만 창고 바로 다음에 있는 첫 번째 방이었다.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듯, 그것은 어쩌면 나영을 위한 사찰 측의 배려인지도 몰랐다.  

    

산사 생활이 시작되는 첫째 날 이른 새벽, 나영은 밖에서 나는 목탁과 염불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어둠 속에서 시계를 보니 4시쯤 되어 보였다. 방문을 살며시 열고 밖을 내다보니 한 스님이 가사장삼(袈裟長衫, Scapular & Monk's robe)을 갖추어 입고 손으로는 목탁을 ‘딱딱’ 두드리고 입으로는 염불을 외우며 경내를 돌고 있었다.  

'아니, 저 양반은 잠도 안 자고 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도대체 무얼 하고 있노? 이 야밤에 저렇게 혼자 마당을 돌고 있는 걸 보니 혹시 몽유병 환자 아냐?'   


이렇게 나영이 의아해하고 있는 사이,  승방의 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더니 각 방에서 스님들이 문을 열고 나와 그를 따라 돌기 시작했다.     

'어허이, 갈수록 태산일세. 어디 강강술래 대회에라도 나갈 일이 있나?'    

그들은 목탁 두드리는 스님을 따라 염불을 외우며 같이 뺑뺑이를 몇 바퀴 돌더니 법당으로 들어갔다.

이왕 잠도 깼겠다, 다들 일어나서 저러는데 남의 집에 더부살이로 들어온 놈이 혼자 쩔쩔 끓는 온돌방에 덩어리 지지고 누워서 쿠락쿠락 잠만 자고 있기도 미안하여 나영도 옷을 갈아입고 법당으로 따라 들어가 앉았다.  2월의 추운 겨울날, 난방시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법당 마루 바닥에 방석 하나 깔고 앉아 가부좌 틀고 한 30분 앉아 있었더니 다리에 감각이 없다.    

'아이구야, 이거 장난 아니네. 저 사람들 다리는 무슨 돌덩이로 만들었나?'    


예불을 마치고 겨우 일어서니 이번에는 다리에 쥐가 내린다. 그러자 스님 한 분이 첫날부터 그리 무리하는 것 아니라면서 앞으로 새벽예불에는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일러줘 나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부터 나영에게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었다. 


아침을 먹고 난 후에는 절 입구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 나무 아래 앉았다가, 방에 돌아와서는 비교해부학 책을 펼쳐놓고 한두 시간 공부를 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밖에 나가 계곡 바위에 앉아서 흐르는 물을 보며, 모퉁이 돌아서 올라오는 길을 보며, 긴 상념(想念)에 잠겼다. 

저녁이 되면 밥하는 보살이 차려다 주는 밥을 먹고 책 좀 보다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런 변함없고 따분한 산중생활 중에서도 큰 즐거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연이었다.

그동안 나영이 가장 해보고 싶었던 것, 그러나 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자연을 접하는 일이었다.      

남들처럼 산에도 올라가 보고, 바다에도 뛰어들어보고, 계곡물에 발도 담가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나영. 그랬던 그가 이제 매일 자연의 자태를 감상하며,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자연의 냄새를 맡고,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온 몸으로 그들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뒷 봉창 문울 열면 군불 때는 아궁이가 있고 바로 뒤에는 대숲이 있다.

해 뜰 즈음이면 작은 새들이 그 숲에 모여 지지 배배 재잘대고, 해 질 녘이면 다시 날아와 똑같이 우지진다.

매일같이 그들의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나중에는 그들의 말을 알아듣게 되었다. 

    

그들은 대숲에 모여 콘퍼런스를 했다.

모닝 콘퍼런스 시간에는 서로 인사하고 먹잇감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이브닝 콘퍼런스 시간에는 일일보고와 함께 잡담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해가 지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순식간에 날아가고, 손님들이 사라진 대숲에는 지나가던 바람이 그 자리를 채운다. 


봉창 문을 열어놓고 대숲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뭇잎 두드리는 빗소리와 하나 되었다. 그 소리에는 고저가 있고, 강약이 있고, 장단이 있는 자연의 협주곡이었다. 

때로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감미로운 속삭임으로, 때로는 자신을 질책하는 격정적인 비트로, 때로는 남모르게 흐르는 눈물 같은 흐느낌으로 다가와 나영의 마음을 적셨다.     


계곡 바위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물은 조용히,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자연의 섭리를 속삭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항상 낮은 곳에 임하라.“

"세상만사 물 흐르듯 순리대로 행하라.“

"쉼 없이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정진(精進)하라.“   

  

저녁이 되면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가 된다.

병풍처럼 둘러싼 나지막한 산들 품에 안긴 아담한 절, 

저녁 으스름 속에 곧게 피어오르는 하얀 굴뚝 연기, 

승방의 창호지 문을 통해 스며 나오는 은은한 촛불 빛,

적막 속에 간간이 들려오는 흔들리는 풍경(風磬) 소리, 

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바로 평안(平安) 그 자체였다.     


저녁식사 후 방에 앉아 촛불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와 대화를 할 때면, 

대숲 속의 바람 소리도 함께 끼어들어 긴 겨울밤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들리느니 목탁 소리와 염불 소리, 바람 소리와 새소리뿐, 더불어 말할 사람도 할 일도 딱히 없는 나영은 묵언(默言)과 무행(無行)을 통해 상념(想念)에서 무상(無想)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런 생활이 두어 달 계속되자 나영의 생활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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