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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우물 Nov 08. 2022

생사삶 09 경찰의 품격(下)

생각을 담은 그릇


의전(儀典)을 중요시 여기는 조직을 들라하면 당연히 경찰, 군대, 외교가 등 국가 조직이 제일 먼저 떠 오를 것이다. 내가 포상을 받으러 경찰서에 갔다가 그 상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느낀 언짢은 감정은 바로 이 점에 있다. 그 어떤 조직보다 의전을 중요시 여겨야 할 경찰이 모범시민(?)을 상대로 그 의전을 개무시했다는 점.


그날따라 비는 부슬부슬 오고 날은 무더웠다. 하지만 나는 나라로부터 상을 받는 자리에 가는 만큼 예를 갖추기 위해 싱글 슈트에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으로 갔다.


하지만 내가 받은 대접은 의전이란 단어를 쓰기에도 민망한, 그냥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지켜야 할 기본예절에도 못 미치는 허접한 것이었다.


내 아버지는 평생 이 나라 공무원으로 사셨다. 

나는 어려서부터 예(禮)를 중시하는 부모의 교육을 받고, 국가 기관장으로서의 아버지 모습을 보면서 컸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 국민의 공복이 갖추어야 할 자세와 품격에 대해 배우며 성장했다.

 

그러다 보니 의전에 어긋나는 관료들의 행동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예민할 뿐 아니라, 이럴 경우 내 머리는 자동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로 넘어간다.


'만일 내 아버지가 경찰 서장이라면 이런 일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답)
당연히 서장실로 모셔서 격식을 차려 표창장과 선물 전달식을 하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난 후, 차 한 잔 대접하면서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한다.


그러면 받는 사람은 '그동안의 내 수고가 헛되지 않았구나' 하면서 흥감해할 것이고, 이런 노고를 알아주는 경찰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또한 그 표창장은 액자에 넣어 걸어 두고 더더욱 열심히 고발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과정도 무시한 것이다.

 



교통위반 단속하는 데 있어서 눈에 띄는 교통경찰과 눈에 안 띄면서 열성인 시민 중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일까?

생각해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나 같은 사람한테 한 번이라도 고발당해 본 사람은 이제 다른 차량 운전자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경찰이 안 보인다고, 단속 카메라가 없다고 함부로 위반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2014년 1월부터 8월까지 교통법규 위반 차량 329건을 고발했다. 

첫 2,3개월은 일주일에 한두 건 하다가 작업이 손에 익은 후로는 하루 평균 3-4건, 최대 8건까지 고발했다.

이만하면 월급 주는 교통경찰 서너 명 풀어놓는 것보다 돈 안 드는 나 같은 사람 하나 잘 관리하는 것이 훨씬 나은 것 아닌가?


서장의 입장에서 한 번 보자.

이런 사람에게 감사장 하나 수여하는 일, 일 년에 두 번이면 된다. 그리고 이 행사 한 번 치르는 데는 20분이면 떡을 친다.


그러면 고발하는 나는 얼마만 한 투자를 했을까?

내가 들인 노력과 시간과 애로사항에 대해서는 지면 관계상 여기서 일일이 다 쓸 수 없어 그냥 넘어가겠지만 경찰과는 아예 비교가 안된다. 말이 329건이지, 그것 참 보통 일이 아니다.


나 같은 사람은 스파이 조직으로 치면 돈 안 푼 안 줘도 제 스스로 고급 정보 물어다 주는 충실한 휴민트나 마찬가지다. 


이런 중요한 에이전트에게 담당관이 격 떨어지는 허접한 대접을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아이고, 마~ 말아라!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내가 미쳤나?" 하면서 나가떨어지게 만든다면 국가적으로도 얼마나 손실이냐?

 

그 결과는 건수가 말해준다.

2014년 1-8월까지 8개월 동안 329건이던 것이, 이 일이 있고 난 후 그해 12월까지 사 개월 동안에는 27건으로 뚝 떨어져 총 356건이 되었다.


그러던 것이 2015년엔 21건, 2016년엔 30건. 2017년엔 55건, 2018년엔 1건으로 떨어지더니 2019에는 0건으로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이 일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공권력의 대민(對民) 자세에 관한 문제다.

일개 시민이 경찰에게 무슨 의전씩이나 바라겠는가?

그저 상식에 준하는, 기본예절에 벗어나지 않는, 기본 품위만 유지해 달라는 소박한 바람뿐이다.

국가 공권력의 품격은 곧 국가의 품격이지 않겠는가?




* 아래의 사진들은 교통안전 캠페인의 일환으로 경찰이 내 건 플래카드와 포스터를 찍은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2015년 6월 25일
2015년 6월 27일

 

첫 번째 사진은 '운전 시 안전띠를 단단히 매자.'라는 의미의 표어인데 '단디해라'라고 명령형을 썼다.

두 번째 사진은 '정지선을 지키자.'라는 의미의 문구인데 '그만온나 정지선!'이라며 역시 명령형을 썼다.

거기다 덧붙여 '이선 넘어오면 짐승'이라고 썼다.


시민을 향해 이것 안 지키면 '짐승'이라 말한다.

이거 실화 맞나?

참말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그로부터, 7-8년이 지났다.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그 캐캐 묵은 일이 생각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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