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초음파 환자가 늘어나면서 환자 대기시간이 길어져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
대기실 의자 사이에 홈이 두 개 나 있는 걸 보고 '옳거니! 저기에 책을 꽂아두면 환자들이 기다리는 동안 책을 읽을 수 있겠구나.' 싶어 각 홈에다 내 책을 두 권 씩 꼽아 두었다.
그 후, 검사실과 판독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대기실에 있는 사람들이 ‘어떡하고 있나?’ 하고 살펴보았더니 대부분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T.V. 를 보고 있고, 100 중 두셋 정도가 책을 뒤적이고 있어 '괜한 짓 했나?' 싶어 후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출근하면서 그곳을 지나다 보니 책이 한 권 없는 것 아닌가!
어찌 된 영문인지 접수대 여직원에게 물어보니 전 날 청소아줌마가 책을 이리저리 들춰보다가
"이거 한 권 집에 가져가 읽고 도로 갖다 놓으면 안 되겠냐?"라고 청하기에 그리하라 했단다.
참으로 뜻밖이었다.
그녀는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으로서 다소 심술궂어 보이는 얼굴에 한쪽 고관절에 문제가 있는지
걸을 때 몸을 좌우로 약간 저는 퉁퉁한 아줌마다.
본인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표정도 그런 데다 평소에 만나면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해서 별로 호감이 안 가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봐도 배운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아서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내 책의 첫 대출자라니!!??
놀랍고 감사하고 한편으론 미안했다.
그날 오후, 화장실을 가다가 그 아줌마를 만났다.
“아주머니, 책 다 읽었어요? 읽고 나면 독후감 써내야 하는데. ㅎ”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더.”
다음날 책이 제자리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또 만났다.
“교수님, 책이 참 재미있었슴니더. 틈틈이 메모도 해놓고 예. 우리 아들한테도 한 번 읽어보라 해야겠네요.”
“그래요? 그럼 내 방에 좀 갑시다.”
나는 그녀를 방으로 데리고 가 새 책 한 권에 본인의 이름을 쓴 후, 그 아래에 덕담 몇 마디 적고 저자 사인을 해서 정중히 증정하였다.
다음날 점심시간.
식사 후 방에 돌아와 보니 내 책상 위에 웬 테이크아웃 용 커피 한 잔이 메모와 함께 놓여 있었다.
교수님!!
책 선물 감사의 마음으로
따뜻한 차 한잔 드시라고
갔다 놓았습니다.
(커피숍에서 교수님 맞춤 커피로…)
그 글을 읽는 순간,
커피보다 더 따뜻한 온기가 내 가슴에 스며들었고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그동안 내 책을 여러 사람에게 선물해봤지만 감사의 답례를 받아본 적은 딱 한 번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 한 사람에게서 이런 답례를 받게 될 줄이야!
나의 커피 취향은 아주 연한 따뜻한 아메리카노.
어쩌다 한 번씩 들르는 원내 카페에 가면 주문대 앞에서 내가 하는 말은 항상 같다.
“아메리카노, 아주 연하게. 3/4 샷만.”
그녀가 갖다 놓은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넣어보니 바로 그 맛이다.
나는 차 맛을 음미하며 눈을 감고 그녀가 되어 상상을 해 본다.
'카페에 가면서 하고 있었을 생각들'
'카페에 내려가 차 한 잔 주문하면서 바리스타와의 사이에 오갔을 말들'
'커피를 내 책상에 내려놓고 메모를 쓰며 품었을 생각들'
그러면서 내 마음속엔 이런저런 상념이 떠 올랐다.
‘청소 아줌마가 월급을 받으면 얼마나 받는다고 이런 답례씩이나~! ㅊㅊ’
‘차 한 잔 시키면서 내 취향까지 물어가며 주문하는 그 세심함이라니!’
‘몸도 불편한 사람이 그 뜨거운 것 들고 오다 자칫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범내골 로터리가 내려다 보이는 내방 창문 앞에 서서 커피 한 모금 넘길 때마다 그녀의 정성 어린 마음을 음미하며 행복감에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