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38 판도라의 상자 속 희망

by 한우물
판도라의 상자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깊이 생각케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신들 중 인간의 편에 선 유일한 신이었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다. 이에 분노한 제우스는 인간과 프로메테우스 모두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하고, 인류 최초의 여성인 판도라를 만들어 밀봉된 항아리(pithos, 훗날 '상자'로 와전됨) 하나를 들려주며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보낸다.


그녀의 미모에 반한 에피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선물은 무엇이든 받지 말라"던 형의 당부를 외면한 채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판도라는 절대 열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걸린 그 항아리를 끝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열어버리고 만다.


그러자 항아리 속에 들어있던 질병과 노화, 시기와 질투, 원한과 고통 같은 온갖 재앙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집 안 구석구석으로 흩어졌고, 이에 당황한 그녀가 황급히 뚜껑을 닫았을 때 항아리의 맨 밑바닥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바로 '희망(elpis)'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신화를 떠올릴 때마다 하나의 질문 앞에서 멈추게 된다. 그 희망은 과연 축복이었을까, 아니면 마지막 남은 또 하나의 재앙이었을까?


희망의 정체

철학자 니체는 희망을 두고 "인간의 고통을 연장하기 때문에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악한 것"이라 평했다.

그의 시각으로 신화를 다시 읽으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결을 띤다. 항아리 안에 끝까지 남아있던 희망 역시 형식만 다를 뿐 다른 재앙들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질병과 죽음이 인간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가했다면, 희망은 헛된 기대를 품게 함으로써 그 고통을 스스로 끝내지 못하도록 붙잡아두는 족쇄로서 가장 잔인한 형태의 저주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인류를 지탱해 온 힘은 바로 그 '나가지 못한 희망'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재앙들은 항아리 밖으로 나가 인간의 손에 잡히지 않는 날아다니는 실체가 되면서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직접적으로 타격했지만. 희망만은 항아리 속에 남아 인간의 손이 닿는 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는 고통이 외부의 환경에서 오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버티게 하는 힘은 내면에 간직된 그 '무엇'이어야 한다는 상징성을 띠는 것 아닐까.


현실 속에서의 희망

나는 의사로서 진료 현장에서나 내 주변에서 희망이 사람을 살리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말기 암 판정을 받고도 5년 이상 살고 있는 환자, 치료 불가라는 판정을 받고서도 기어이 완치된 사람. 그들에게 희망은 비과학적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는 생물학적 힘이었다. 플라세보 효과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강력한, 그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훨씬 더 많다.

효과를 보증할 수 없는 새로 나온 치료법이나 신약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기약도 없는 날을 하루하루 연장해 가면서 더 큰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희망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견디기 힘든 고난과 절망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게 하는 데는 희망만 한 것이 없지만, 희망에 너무 집착하는 순간 그것은 재앙으로 돌변하고 만다.


뚜껑을 다시 열지 않을 용기

희망이 항아리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이 아직 '미완의 가능성'으로 남아있음을 뜻한다.

밖으로 나간 재앙들은 이미 결정된 사실(fact)이 되어 우리를 구속하지만, 안에 남은 희망은 우리가 꺼내어 쓰기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는 가변적인 에너지다.


결국 '판도라의 항아리 속 마지막 남은 것'은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에 대한 헌사다.

신은 인간에게 완벽한 세상을 주지 않았지만, 대신 무너진 세상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지막 한 조각'을 남겨두었다.


우리가 삶의 무게에 짓눌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내면의 깊숙한 곳, 그 낡은 항아리 바닥에는 여전히 나가지 못한 희망이 숨을 죽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희망은 손에 쥐는 것이 아니다. 항아리 바닥에 그냥 놓아두는 것이다. 꺼내 쓰려하지 않아도, 그것이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오늘을 살아낸다.


"모든 재앙을 다 겪고도 내가 아직 여기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다."





※ 표제사진 출처:Generated image using Nano Banana P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