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은빛 달, 감춰진 맹약

그 밤, 달은 다 보고 있었다.

by 붕어예요

보름달이 떠오른 밤, 병영은 낮보다 더 분주했다.
시약고 앞에는 줄지어 선 하인들이 꾸러미를 내리고,
병사들은 검수에 여념이 없었다.
등불은 바람에 흔들려 길게 기울었고,
달빛은 지붕 위에 은빛을 흘렸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일상이었으나,
윤재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오늘이다.
장복이 귀띔했던 바로 그날.
시약고 뒤 빈방의 자물쇠가 열리는 밤이었다.

윤재는 무심한 얼굴로 병사들 사이를 오가며
시선을 뒷마당으로 고정했다.
병사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틈바구니에서
그는 숨소리조차 가누었다.

“이 추운 날씨에 고생이 많네.”

관리인이 형식적인 격려를 건네자
병사들이 건성으로 대꾸하며 웃었다.

그 틈에,
관리인과 윤 씨 부인이 보낸 하인 하나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뒤편으로 사라졌다.
윤재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담장 그늘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덜컥’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렸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가 작은 꾸러미를
품에 안고 나왔다.
꾸러미의 모서리에서 누런 빛깔의 뿌리가 언뜻 스쳤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멀어지자 윤재는 숨을 죽였다.
곧장 뒷마당으로 몸을 날렸다.
달빛이 담장 위에서 그의 어깨를 스치며 흘렀다.

같은 시각, 한성 북촌 깊숙한 곳.
영의정 김동신의 사저 사랑채에는
은빛 달이 비치고 있었다.
겉으론 평온했으나,
안채 사랑방에는 다섯 명의
중신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바람이 스치자 등잔불이 흔들리며
벽에 요괴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대감, 이 밤중에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다니,
무슨 중대사가 있으십니까?”

좌변에 앉은 이조판서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잔을 기울이면서도 시선은 끊임없이
김동신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김동신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보름이니 더욱 은밀히 움직일 수 있지 않겠나.”

그의 눈빛은 미소와 달리 차갑게 빛났다.

윤재는 아직 완전히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곰팡이와 흙냄새가 섞인 어둠이 훅 밀려 나왔다.
창 없는 방은 칠흑 같았고,
달빛이 작은 틈으로 스며들어 바닥 먼지를 드러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래된 마룻바닥이
삐걱 소리를 냈다.
가슴이 쿵쿵 울려 마치 그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구석 장막을 젖히자,
항아리 몇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대부분은 비어 있었으나,
단 하나만 봉인이 온전히 남아 있었다.
윤재는 무릎을 꿇고 봉인을 풀었다.
손끝에서 끈이 바스러지고 뚜껑이 열렸다.
순간, 은근하고 알싸한 풀내음이 코끝을 찔렀다.

항아리 속에는 누렇게 마른 뿌리다발이
고요히 놓여 있었다.

‘연자근…!’

강성노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흔한 약재 같지만 가까이 맡으면
알싸한 향이 진동한다는 그 말.

윤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 한 줌의 뿌리가야말로 세자의 죽음을
뒤집을 열쇠일지 모른다.
그는 손을 떨며 뿌리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한편, 김동신의 집 사랑방.
기름등잔이 낮게 타올라 어른거리는
불빛 속에서 대신들의 목소리가 교차했다.

“전하께선 여전히 그 의관의 이름을 입에
올리신다 들었습니다.”

“백서라 부르며, 지금도 불러오려 한다는 말까지…”

이조판서의 말에 다른 대신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좌의정의 죽음 이후에도 왕의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았음을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동신은 술잔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탁탁 두드렸다.

“그러니 우리가 더 서둘러야 하겠지.”

“서두르다니요?”

병조판서가 놀라며 물었다.


“흔적을 지우라는 말이네.
연자근이 남아 있는 한,
과거는 언제든 끌려 나올 수 있음이야.”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대신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침묵했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다가왔다.
윤재는 황급히 항아리 뚜껑을 덮고 몸을 숨겼다.
문살 사이로 그림자가 비쳤다.
천천히 움직이는 그림자.
관리인이었다.
그는 방 안에 들어와 항아리를 살폈다.
봉인이 어긋난 것을 확인하자 눈빛이 매서워졌다.

“누군가 다녀갔군…”

그는 낮게 중얼거리더니,
항아리를 다시 봉했다.
그리고는 곧장 중얼거렸다.

“… 내일이면 모두 옮겨야겠군.”

윤재는 땀에 젖은 손으로 품 안에
뿌리 몇 가닥을 쥐었다.
들키면 끝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내일이면 모든 흔적이 사라질 것이다.
심장은 귀 옆에서 요란하게 울리고,
온몸의 피가 뒷목으로 치솟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어둠 속에 몸을 웅크렸다.

그 시각,
김동신은 술상을 물리고 방 안의
중신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모두들 명심하시게나
이제 그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목숨을 잃는다는 사실을.”

그의 말에 대신들의 어깨가 굳어졌다.
방 안의 침묵은 무겁게 가라앉아,
등잔 불빛조차 두려워 떠는 듯했다.

“세자는 이미 죽었네
역사는 우리가 적는 것이지,
누군가의 양심이 아니란 말일세.”

그는 잔잔히 웃었으나,
등잔 불빛이 그의 눈동자에 스치자
그 웃음은 서늘한 위협으로 바뀌었다.

윤재는 달빛을 따라 방 밖으로 빠져나왔다.
발소리를 죽이고 담장 그늘을 타고 돌아 숙소로 들어왔다.
품속에서 조심스레 뿌리를 꺼냈다.
희미한 달빛에도 누런 빛깔이 선명했다.
씁쓸한 향이 손끝에 남아 진동했다.

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제 이것을 지켜내야 한다.
동시에, 저 멀리 다른 어딘가에서 또
다른 입들이 침묵을 강요받고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윤재는 결심했다.

“이제… 시작이다.”

그리고 같은 밤, 또 다른 방 안.
서화는 홀로 앉아 있었다.
연화암에서 가져온 서찰은 서랍 깊숙이
묵직한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얇은 종잇장이건만,
꺼내는 순간 세상이 흔들릴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서찰을 꺼냈다.
바랜 종이 끝이 떨리는 손가락에 스쳤다.
눈을 감으면, 새벽안갯속에서 마주했던
외조부의 글씨가 떠올랐다.
먹빛이 옅어져 휘청이는 글줄마다
외조부의 고통과 후회,
그리고 전하려는 진실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이걸 어머니께 전해야 할까…?
어머니는 평생 백서를 원망하셨다.
외조부께서도 차마 밝히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는데…
내가 이걸 전하는 것이 옳은 걸까?"

망설임은 깊어졌다.
혹여 어머니의 마음에 더 큰 상처를
남기게 되는 건 아닐까.
차라리 묻어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어머니 곁에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떠오른 건 외조부의 떨리는 필획이었다.

“외조부께서 목숨을 걸고 남기신 말이라면,
내가 어찌 묻어둘 수 있을까.”

서화는 단단히 입술을 깨물고
서찰을 접어 다시 두 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어머니를 찾아 나섰다.
서화는 뜰을 가로질러 어머니의 처소로 향했다.

늦은 시각,
툇마루 위에 켜둔 등잔불만이 어스름 속을 밝히고 있었다. 문 앞에 다다른 서화는 잠시 숨을 고르다,
손끝으로 문을 살짝 열었다.

“어머니…”

윤 씨 부인은 침상 곁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서화의 목소리에 눈길을 돌리더니,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냐, 서화야.”

서화는 한참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손에 쥔 서찰을 내밀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망설임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품 속에서 조심스레 꺼낸 서찰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어머니 앞에 놓았다.

“연화암에서… 외조부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윤 씨 부인의 눈빛이 순간 굳었다.
떨리는 손길로 봉투를 집어 들었다.
오래전 떠나보낸 아버지의 필적을 보는 순간,
그녀의 손끝은 푸르게 질렸다.

서찰은 짧았으나, 글자마다 비수와도 같았다.

“백서의 약에는 문제가 없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시약고에 다녀갔다…”

윤 씨 부인의 입술이 새하얗게 바랬다.

“김판윤…?”

그녀가 낮게 읊조렸다.
서찰 속에서, 윤현조는 분명 그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 뒤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끝내 외조부는 홀로 죽음을 맞았다.

서찰 끝자락의 필획에 다다른 순간,
윤 씨 부인의 어깨가 크게 흔들렸다.

‘희생이 필요하다면, 나 하나로 충분하다…’

그 대목을 읽는 순간,
그녀의 눈에서는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 흘러내렸다.

“아버지께서… 그런 심정으로 떠나셨구나…”

윤 씨 부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
서화는 차마 어머니를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방 안에는 흐느낌만이 울려 퍼졌다.
그러다 이윽고, 윤 씨 부인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젖은 눈빛 속에,
깊은 혼란과 분노가 동시에 일렁이고 있었다.

“그때의 판윤이… 그가 이 일을 덮었다는 말인가.”

그녀의 손은 서찰을 부여잡은 채 파르르 떨렸다.
백서를 원망하며 살아온 세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그리고 지금 드러난 단서.
모든 것이 뒤엉켜 윤 씨 부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서화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말했다.

“어머니, 이 일은 부디 누구에게도 전하지 마옵소서.
제가 반드시 진실을 밝혀내겠사옵니다.”

윤 씨 부인은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흐릿해진 시선으로 서찰만을 응시했다.
방 안에는 등잔불이 잔잔히 깜박이며,
무너져 내린 모녀의 숨결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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