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깊어질수록 밤은 길어진다.
저녁이 깊어 마당에 기척이 드물어졌을 때,
발걸음 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공기 속에는 오래 묵은 나무 향과
약간의 습기가 배어 있었고,
등잔불은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련님, 마님께서 지금 사랑채로 오시랍니다.”
윤재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덮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손끝에 남은 종이의 온기가 서서히 식어갔다.
무슨 일인지 이미 짐작이 갔다.
사랑채 문 앞에 이르자,
안쪽에서 단단한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들어서니 향로의 연기가 은은히 떠 있었고,
정 씨 부인은 붉은 보료 앞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찻잔을 손에 들었지만 입술은 닿지 않았다.
윤재가 절을 올리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네가 요즘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들었다.”
정 씨 부인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그녀의 말투는 매서웠지만,
눈빛 속 어딘가에는 깊게 묻어둔 우려가 번뜩였다.
“그만두어라.”
윤재는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습니다.”
“혹여 이 일이 잘못된다면 너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다.”
“저는 감당하겠습니다.”
“감당? 네가 어떻게 뭘 감당하겠다는 게야
집안까지 위험에 빠진다.
그리고 네가 지키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화가 번질 수 있다.”
윤재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눈동자 속에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라앉은 듯 반짝였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를 지키겠다고 마음을 세웠다면,
거기서 발길을 돌릴 수 없습니다.”
정 씨 부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 서화냐.”
“예.”
자신 있게 답했지만 왠지 윤재는
문뜩 자신이 이렇게 까지 서화를
지키려 하는지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허나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구해 줬던 날 이유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월촌에서 아이들에게 미소 짓던 서화를 보며,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 달 뒤, 그만두라던 자신에게
서화가 “다시는 보지 말자”라고 했을 때는
이상하리만큼 숨이 막혔다.
그런데 그 서화가 품에 안겨 울었을 때,
그는 깨달았다.
지켜야 한다—그게 전부였다.
“그 아이는 어쩌면 너와는 다른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등 뒤에서 등불 하나쯤은 들 수 있습니다.
길이 달라도, 밤은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정 씨 부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좋다. 내 더는 반대하지 않으마. 대신 조건이 있다."
정 씨 부인이 천천히 일어서 윤재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리곤 윤재의 갓 끈을 고쳐 메주며 말했다.
"윤재야, 겁을 먹을 땐 반드시 멈추거라.
겁 없는 자가 무모하고,
멈출 줄 모르는 자가 사람을 잃는 법이란다.”
윤재가 어렸을 적 처음 갓 끈을 매어주던 그 손길
어머니의 손길은 변함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니”
윤재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고 부드럽게 깔렸다.
정 씨 부인은 갓 끈에 이어 윤재의 어깨 매무새를 다듬고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 어미가 네 뒤에서 바람을 막아주마."
윤재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어머니, 소자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정 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거라. 아직 밤이 얕다.”
사랑채를 나서자, 찬 공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그러나 방금 전의 온기가 가슴속 깊이 남아,
쉽게 식지 않았다.
그렇게 윤재는 마당을 지나 쪽문 쪽으로 향했다.
그때 담장 모퉁이 너머에서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만초방에 있던 그 약초들을 다 거둬
들여서 옮겼다고? 아니 왜? 누가 그러했다는 말인가?”
“아, 글쎄 대제학댁 윤 씨 마님 분부대로 다 거둬서
시약고 뒤 빈방에 숨겼다니까? 아무도 모르게.”
윤재의 발걸음이 멈췄다.
숨을 죽이고 기둥 그늘에 몸을 기대었다.
“혹시… 그 소문만 무성한 연뭐시기 라는 약초가 그 안에 있는 거야?”
“쉿! 입 함부로 놀리지 마. 잘못하면 목이 날아간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윤재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연 자가 들어가는 그 약초’—
연자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위치. 시약고 뒤 빈방.
그 안에, 윤 씨 부인이 거둬들인
연자근이 있다는 것이다.
발걸음이 저절로 시약고 쪽을 향했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기 직전, 그는 걸음을 멈췄다.
당장 문을 열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성급한 발걸음은 곧 발각으로 이어진다.
그곳은 은밀히 숨겨 놓은 것 이 있으니
자물쇠와 눈, 그리고 주인의 경계가 얽힌 곳일 터
윤재는 담장 그늘에 서서 숨을 고르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난 왜 이 약초를 꼭 찾아야 하는가.
답은 분명했다.
세자 사건의 모든 화살은 연자근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부작용이 세자의 죽음을 불렀다고 믿었고,
윤현조와 백서를 그 죄인으로 몰았다.
하지만 강성노가 말해준 진실은 달랐다.
연자근 자체는 독이 아니었다.
그 탕약에 다른 무언가가 섞였고,
그것이 세자의 숨을 끊은 것이다.
그렇다면, 숨겨진 연자근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 실물만이 진실을 증명한다.
말뿐인 항변으로는 부족하다.
물증 없이 고발하면,
되레 무고로 몰릴 수 있다.
연자근은 칼이자 방패—
진실을 가르는 칼, 정치적 반격을 막아내는 방패였다.
서화가 그토록 연자근을 찾는 것도
처음엔 단순한 선의였지만 이제는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그것은 외조부의 억울함을 풀 마지막 단서이자,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빼앗기지 않게 해 줄
유일한 증거였다.
윤재는 그걸 잃는 순간,
그녀의 싸움이 허공에서 무너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더 큰 위험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윤재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서, 목숨을 걸더라도 찾아야 한다.
그게 진실로 가는 길이고, 서화를 지키는 길이었다.
멀리 시약고 지붕이 어둠 속에서 윤곽을 드러냈다.
달빛이 구름 사이로 비집고 나와 지붕 위를
은빛으로 덮었다.
그 안 어딘가에, 모든 사건의 실마리가 잠들어 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병영 쪽으로 걸었다.
지금은 무모한 돌입보다, 틈을 만드는 것이 먼저다.
빈방을 지키는 자, 그리고 열쇠를 쥔 자—
그 둘 중 하나를 먼저 흔들어야 했다.
밤공기는 서늘했지만, 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병영 안으로 들어서자,
경계병들의 시선이 잠시 그를 스쳤다.
윤재는 무심한 걸음으로 숙소 쪽으로 향하며
머릿속으로 시약고의 배치를 그렸다.
정면은 관리인의 거처와 맞닿아 있고,
양 옆은 담과 창고가 막아선 구조.
유일하게 눈이 닿지 않는 곳은—뒷마당.
그곳에 문제가 되는 ‘빈방’이 있었다.
정면은 피하고, 뒷길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낮에 드나드는 자들의 동선을 알아야 했다.
윤재는 곧바로 자리에 앉아
잡역 하인 명단을 떠올렸다.
그중 한 명, 이름은 장복.
장복은 손재주가 좋으나 말수가 적기로 유명했다.
이튿날 새벽, 그는 일부러 시약고 근처
우물가에서 장복을 기다렸다.
물동이를 이고 나온 장복이 윤재를 보고 움찔했다.
“도련님, 어쩐 일로 여기에…”
“한 가지 묻겠다. 시약고 뒤 빈방, 누가 드나드느냐.”
장복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거의 아무도 안 갑니다. 간다 해도, 그건—”
말을 잇지 못했다. 윤재가 한 발 다가서자,
장복이 눈을 내리깔았다.
“… 다음 보름날, 약재 검수하는 날에만 열립니다.”
“그날엔 누가 열지?”
“관리인과… 윤 씨 마님께서 보내신 분 이옵니다.”
윤재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보름날—그날이 빈방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 틈만 잘 잡으면, 무모한 돌입 없이
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말, 아무에게도 하지 마라.”
윤재는 물동이를 대신 들어 우물가에 내려놓았다.
장복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윤재는 생각했다.
보름날… 그날이 기회다.
그날까지는 철저히 숨을 죽이고,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 시각, 서화는 등잔불을 낮추고 붓을 내려놓았다.
그 글자 하나하나에는 낮 동안 마주한 장면과
감정이 고스란히 스며 있었다.
종이 위에는 그날의 기록이 빼곡했다.
그러나 붓끝에 남은 먹은 식지 않은 불안이었다.
연자근… 찾아낼 수 있을까?
문밖에서 바람이 스쳤다. 그 바람 사이로,
발소리가 미묘하게 섞여 있었다.
서화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밤중에 사랑채 앞을 지날 이유가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달빛이 가린 마당 한쪽,
검은 그림자가 스르르 기둥 뒤로 스며들었다.
마치 땅 위에 드리운 먹물처럼,
어둠은 조용히 번져갔다.
서화의 눈동자가 좁아졌다.
그림자는 잠시 멈추더니, 창호 틈새로 안을 엿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무언가를 확인한 듯, 발걸음을 돌렸다.
"거기, 누구십니까?"
서화는 서둘러 창호를 열고 마당을 내다봤다.
그러나 이미 그림자는 담장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누구지…? 서화의 손끝이 떨렸다.
단순한 하인의 장난이 아니라는 예감이,
살결을 따라 스며들었다.
그 예감은 곧, 보름날로 향하는 길 위에
놓일 또 다른 그림자일지도 몰랐다.
서화는 창호를 천천히 닫으며 숨을 고르았다.
밤공기에는 설명할 수 없는 냄새가 묻어 있었고,
심장은 조용히 빨라졌다.
그리고 서화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에
본인을 해치려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로 비밀이 밝혀지면 안 되는 자들일 것이다.
그 생각은 불안과 결심을 동시에 데려왔다.
그래도 서화는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때가 오면, 그녀 역시 발을 내디뎌야 한다.
창밖 어둠이 얇게 흔들리며,
등잔 불꽃이 낮게 떨렸다.
아주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