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침묵의 끝.

정도를 걷는 자, 겁쟁이라 하였나.

by 붕어예요

다음 날 밤, 김지헌은 심복 하나만 데리고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나왔다.

전날 서화가 찾아와,
누군가 자신에게 전언을 전하며 겁박했다고 털어놓은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그는 밤새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더는 이대로 눈감고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돌더미를 짊어진 듯 무겁고 느려졌다.

뒤따르던 대정이 나지막이 물었다.


“나으리, 소교자도 아니 타고 가시렵니까?”


그 말에 김지헌이 걸음을 멈췄다.

갈 곳 잃은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대정아... 난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냐.

내가 서화를 지킬 수 있겠느냐...”


대정은 짧게 고개를 숙였을 뿐,

묵직한 눈빛 속에 충직한 결심만이 어려 있었다.

달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골목을 지나,

익숙한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묵직한 문 위의 현판 글씨는 세월 속에서도

힘이 살아 있었다.

대정이 문을 두드리자, 곧 안에서 집사가 나왔다.

놀란 눈빛으로 김지헌을 알아보고는 허리를 굽혔다.


“아니, 도련님! 이 깊은 밤중에 어찌 오셨사옵니까...”


아직까지 김지헌을 ‘도련님’이라 부르는 그를 보고,

김지헌은 짧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달 아재, 내 아버님을 뵈러 왔네.”


넓은 마당은 고요했고,

외채의 희미한 등불만이 깜박였다.

멀리 사랑채 안,

촛불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사랑채 문을 열자 묵직한 기운이 흘렀다.

등잔불이 기둥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앞에 앉은 아버지의 모습이 어둠과 섞여 있었다.


“밤중에 이리 찾아온 걸 보니,

네 속이 많이 흔들리는 모양이구나.”


붓을 던지듯 내려놓은 눈빛이 서늘했다.


... 아버님,

더 이상은 서화를 겁박하지 마십시오.

세자의 약이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장인이 어찌 억울한 죽음을 맞았는지,

소자 또한 알고 있사옵니다.

다만 아버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눈을 감고자 했을 뿐이옵니다.”


피식 웃음이 흘렀다.

손에 쥔 붓이 뚝 꺾이며 먹물이 번졌다.


“그 침묵 덕에 네가 대제학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더냐.

세상은 정의로 굴러가지 않는다.

권력이 곧 진실이요, 살아남는 자가 옳은 것이다.”

“허나 그 길이 제 목숨을 살린다 한들,

제 뜻까지 살릴 수는 없사옵니다.

더는 침묵하지 않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벼루가 날아들었다.

한 끗 차이로 비껴간 벼루는 문에 부딪혀

땅에 고꾸라졌다.

김동신은 상기된 얼굴로 역정을 냈다.


“네가 감히 날 겁박하는 것이냐!

아들이라 지금껏 눈감아 준 줄도 모르고,

내가 피로 닦아놓은 길 위에 앉아

지금껏 호의호식했으면서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김지헌은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등잔불이 흔들리며 두 사람의 그림자가 멀리 갈라졌다.

사랑채를 나서자 달빛이 싸늘히 깔려 있었다.

넓은 마당을 빠져나오며 그의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대정이 서둘러 발걸음을 맞추며 뒤따랐다.


“나으리, 괜찮으십니까...”


김지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달빛이 싸늘히 내리깔린 마당을 나서며,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참을 걷던 끝에,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 대정아, 나는 참으로 못난 사내다.

알고도 침묵했고, 보면서도 눈을 감았다.

그리하여 결국 지켜야 할 자들을 더 큰

고통 속에 몰아넣었구나.

정도를 걷는다고 자부했으나,

정녕 나는 겁쟁이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대정은 발걸음을 멈추며,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나으리, 겁쟁이라 말씀하시면

이 나라에 감히 의인이라 부를 이는

남지 않을 것이옵니다.

정도를 지키시려는 그 뜻이 바로 나으리이십니다.”


김지헌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빛 달이 구름 사이로 기우뚱 기울고 있었다.


“허나 이 길을 가면 내 목숨은 부지하지 못하리라.

그럼에도... 차라리 그 길이 나를 삼키더라도,

그것이 옳을 것이겠지.”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섞여 멀리 흘러갔다.

허나 눈빛만큼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오자,

벼루가 부딪히던 둔탁한 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옷자락도 벗지 못한 채 자리에 앉은 그는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먹물이 튀어 검게 번진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그는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

낡은 비단끈으로 묶인 문서 뭉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세자의 탕약 출납 기록, 윤현조가 남긴 서찰,

그리고 김동신이 엮인 뇌물과 토지 탈취의 증좌까지.

그는 그 묶음을 손에 쥐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묵은 글씨가 달빛에 반짝였다.


... 이 많은 것을, 알고도 내 손 안에만 묶어두었구나.”


목소리는 낮았으나, 자책이 깊게 묻어 있었다.

창호 밖으로 은빛 달이 기울고 있었다.

그는 오래 바라보다가 서찰을 단단히 쥐었다.


“이제는 세상 앞에 내놓아야겠지..

숨기지 않고... 내 모든 걸 남기리...”


촛불이 크게 흔들렸다가 이내 곧게 섰다.

그의 눈빛 또한 그 불꽃처럼 단단히 타올랐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김지헌이 붓을 들고 종이에 올렸다.

그러자 오래 삼켜왔던 말들이 한 줄 한 줄 흘러내렸다.

'부인,

그간 부인을 지킨답시고 눈을 감아왔으나

돌이켜보니 그 침묵이 오히려 그대의 짐이 되었구려.

미안하오.

내일 궁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고하려 하오.

부인이 원망해도 좋소.

허나 지아비로서도, 아비로서도

더는 물러설 수 없는 길이외다.

밝고 순수하던 부인의 젊은 시절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올 때가 많았소.

내가 부인을 이렇게 만든 듯싶어 자책도 많이 했지요.

부인…

이 길 끝에 우리 부부의 연도 함께 사라질 것이오.

그래도 부디, 나를 용서하시오.

그리고… 서화만은 굳세게 지켜주시오.'


붓끝이 종이를 깊이 눌렀다.

먹빛 글씨가 번지며 종이 위에 무겁게 스며들었다.

그는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잠시 두 손으로 꼭 눌렀다.

그리고 천천히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방 안은 고요했으나,

그 고요가 오히려 한밤의 천둥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잠시 뒤, 그는 겉옷을 걸치고 밤길을 나섰다.

달빛이 비스듬히 내려앉은 골목을 지나,

익숙한 행랑채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조용히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으리, 이 밤중에 어인 일이시어유?”


춘매가 놀란 얼굴로 문을 열었다.

김지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오늘날이 밝거든 주상 전하께

그동안의 일을 모두 고할 것이다.

그전에 네게 말해줄 것 이 있어 이리 걸음하였다.”


춘매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김지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입을 열었다.


“춘매야, 네가 곁에 있어준 덕에 내가 지금껏

버텨온 걸 아느냐? 그리고... 너와 연심이의 노비 문서는

진작에 불태워 없앴다.

이제 너희는 더 이상 노비가 아니다.

혹여 내가 궐에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연심이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 너희 삶을 살아가거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으리, 워째 그런 말씀을 하신데유...

쇤네보고 어딜 가라 그러시는 거여유...”

떨리는 목소리에 눈물이 고였으나,

더는 울음이 터지지 않았다.

김지헌은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 날 원망하지 않느냐...”


그의 눈빛에 미묘한 연민이 스쳐갔다.

춘매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애써 웃으며 말했다.


“단 한순간도 나으리를 원망한 적이 없었고 만유...

천한 신분인 지를 원망했을 뿐이쥬...”


김지헌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춘매를 끌어안았다.

이내 굳은 결심을 다진 듯,

고개를 돌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밤공기는 매섭게 차가웠으나,

그의 마음은 이미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을 끝자락까지 걸어 나오자,

동쪽 하늘이 서서히 빛을 머금고 있었다.

닭이 울고, 먼 산자락 위로 여명이 번져갔다.

그 빛은 김지헌에게는 구원의 빛이 아니라,

더는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빛이었다.


그는 잠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마음 깊은 곳의 흔들림조차 고요히 가라앉았다.


새벽안개가 가시기도 전,

김지헌은 곧장 궁궐로 향했다.

장검을 든 금군들이 성문 앞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길을 터주었다.

넓은 정전은 아직 비어 있었고,

묵직한 적막만이 깔려 있었다.

내관 하나가 촛불을 들고 그를 맞았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김지헌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고요히 문턱을 넘었다.

어전 깊숙한 자리, 왕은 홀로 앉아 있었다.

은빛 새벽빛이 창호 너머로 스며들어

그의 얼굴을 차갑게 비추고 있었다.

왕의 낮은 목소리가 어전을 울렸다.


“대제학, 이리 이른 시각에…

무슨 연유로 나를 찾았는가.”

김지헌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전하, 신이 감히 이 자리에 나아온 것은...

그동안 감추어 온 진실을 고하기 위함이옵니다.”


왕의 미간이 굳게 모였다.

그러나 깊은 눈빛 속 어딘가가 미묘히 흔들렸다.


“진실이라... 그것이 무엇이냐.”


김지헌의 눈빛은 결연히 빛났다.

어전의 고요는 이미 폭풍을 품은 고요였다.

이전 17화15화. 하나의 침묵, 두 개의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