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진실을 지키는 칼

거짓을 쥔 입

by 붕어예요

사랑채 안은 등잔불만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윤 씨 부인은 찻잔을 두 손에 감싼 채,
오랫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한참을 그러다, 서랍 깊숙이 넣어둔
얇은 서찰 하나를 꺼내 서화 앞에 내밀었다.

“서화야. 아버지께서...
이 한 장을 남겨놓고 입궐하셨구나.”

서화는 천천히 서찰을 펼쳤다.
글자를 따라 내려갈수록 가슴이 조여들었다.
숨이 막혔다. 귀에선 심장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어머니, 이게... 무슨...”

서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윤 씨 부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고개를 들며 담담히 말했다.

“서화야. 설마 하면서도 이미 짐작했을 게다.
세자 저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
그게 바로 네 할아버지, 김동신 대감 이시다.”

서화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갔다가 떴다.
그 이름. 오래전부터 마음속에서 부정하고,
또 부정해 온 글자. 하지만 지금,
어머니의 입술에서 뚝 떨어지니
한기가 등골을 파고들었다.

“... 어머니.”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윤 씨 부인은 찻잔을 받침에 내려놓았다.
‘툭’ 하는 소리가 방 안에 메아리쳤다.

“어미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감히 나설 수 없었다.
진실을 드러내면 집안이 무너질까 두려웠기 때문이지
그래서... 잊고 사는 것이 최선일 거라 스스로를 속였다.”

서화는 시선을 떨구었다.
무릎 위의 손등이 떨리고 있었다.
불안이 확정으로 굳어지는 순간,
그 무게가 뼛속까지 내려앉았다.

윤 씨 부인의 손길이 서화의 손등을 덮었다.
따뜻한 듯, 그러나 떨림이 전해졌다.

“알고 있어도... 막상 확인하면 쓰라린 법이지.
서화야, 이제 마음을 굳게 해야 한다.
진실이 드러날 날이 머지않았어
그리되면 우리 집안도 함께 흔들릴 것이다.”

서화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눈빛은 흔들렸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무게가 담겨 있었다.

같은 밤, 영의정 저택 사랑채.
바람 한 점 없는 정적 속에,
등잔불 세 개가 어른거렸다.
김동신은 홀로 앉아 장부를 펼친 채 붓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비장이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대감, 전하께서 내의원과
시약고를 봉하라 명하셨다 합니다.”

붓끝이 벼루 위에 떨어져 ‘뚝’ 하는 소리가 울렸다.
먹물이 장부 귀퉁이를 적셨다.
김동신의 입가에 짧은 숨이 스쳤다.
그러나 얼굴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 드디어 칼을 빼셨구나.”

그는 먹물이 번진 자리를
손가락으로 눌러 번짐을 지우듯 문질렀다.
한참 침묵을 삼킨 뒤,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흘렀다.

“기록은 오래전에 치워버렸다.
그러나 입은 남아 있다.
시약고를 드나든 의원들, 내관들...
특히 강성노 같은 자.
다시는 입을 열 수 없게 하라.
바로 숨통을 끊어도 상관없다.”

비장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예, 대감.”

김동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호 앞으로 걸어갔다.
달빛이 희미하게 문살을 타고 들어와
그의 뒷모습을 갈랐다.

“내일 조회에서 대신들을 모아라.
세자 저하의 죽음을 빌미로

거짓을 퍼뜨리는 자들이 있다...
이 말이 먼저 퍼져야 한다.
왕의 귀는 진실보다 소문에 먼저 흔들린다.”

그의 손이 창호 위를 천천히 스쳤다.
손가락 끝이 나무살을 긁는 소리가 서늘했다.

“진실은 본디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먼저 말하느냐,
얼마나 많은 입을 모으느냐...

그것이 곧 진실이 되는 것이다.”

비장이 물러난 뒤에도,
김동신은 한참을 창호 앞에 서 있었다.
등잔불이 길게 흔들리며
그의 그림자를 벽에 일그러뜨렸다.
두려움 없는 담담함이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 무렵, 병영 마당에서 두철이 윤재를 불렀다.

“윤재야, 들었느냐? 조정에 피바람이 불겠더구나.”

윤재가 눈을 들어 두철을 보았다.
두철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무겁게 깔려 있었다.

“대제학 대감이 전하 앞에 모든 걸 고했다더라.
세자 저하를 죽게 한 진범까지... 이름을 댔다지 않느냐.”

윤재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귀 안에서 심장이 요동쳤다.
그 말이 메아리처럼 울리는 순간,
뇌리에 스친 장면이 있었다.
타오르는 불길, 잿더미가 된 연화암.
입을 막으려는 자들,

그 들은 불길도 서슴지 않았다.

“... 그렇다면.”

윤재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런 자들이라면 강성노 또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증언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입이라면,
가장 먼저 노릴 터였다.
윤재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발걸음은 곧장 강성노의 집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왕이 움직였다는 소식,
전장에서 수없이 봐왔다.
전세를 바꾸는 건 언제나
‘약한 고리’를 끊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김동신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도착하니
강성노의 집은 이미 쑥대밭이었다.
문짝은 부서져 반쯤 땅에 처박혀 있었고,
기왓장이 깨져 흩어져 있었다.

윤재가 안으로 발을 들이자,
방 안은 더 처참했다.
뒤엉킨 발자국과 흙먼지가 바닥을 덮고 있었고,
찢겨나간 약봉지들이 종잇조각처럼 나뒹굴었다.

가장자리에 엎어진 숯불 화로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남아 천천히 피어올라,
공기에는 타다만 냄새가 배어 있었다.

윤재는 이를 악물며 주위를 훑었다.
저편에서 등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 등불이 보이는 숲 속으로 그는 곧장 달려갔다.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목까지 차오를 즈음,
멀리서 세 남자의 그림자가 드러났다.
그들은 강성노의 팔을 거칠게 붙잡고,
입을 천으로 틀어막은 채 질질 끌고 있었다.
윤재의 발걸음이 땅을 박찼다.

사내들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칼이 뽑히는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윤재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첫 번째 사내의 무릎이 발끝에 부러져 꺾였고,
짧은 비명이 흘렀다.

두 번째 사내의 손목이 비틀리며 칼이 돌바닥에 떨어졌다.
쇳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세 번째 사내는 땅바닥에 내리 꽂히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흙먼지가 자욱이 일어 눈앞을 가렸다.

모두가 순식간이었다.
윤재는 마지막 남은 자의 멱살을 붙잡았다.

“누구의 명령이냐!”

사내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옆으로 흘러내린 옷깃 사이로,
귀 뒤쪽에 새겨진 푸른 대나무 문양이 등불에 드러났다.
윤재의 눈이 번쩍였다.

“... 대나무.”

뒤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강성노가 헐떡이며 말했다.

“그 문양... 내가 전에 본 적이 있네!
영의정 댁을 드나드는 자들이었어.”

윤재는 말없이 눈빛을 굳혔다.
그 순간, 김동신의 그림자가 한층 더 짙어졌다.
윤재는 칼을 거두고 강성노의 팔을 붙잡았다.

“괜찮으십니까?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강성노는 기진맥진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팔과 다리가 떨려 발걸음을 떼지 못했으나,
윤재가 어깨를 내주자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

흙먼지와 피비린내가 스민 골목을 벗어나,
두 사람은 달빛 어린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윤재는 곧장 집안 후원 쪽으로 발을 돌렸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서자,
등잔불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정 씨 부인의 처소가 보였다.
문이 열리고, 단정히 앉아 있던 정 씨 부인이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맞았다.

“윤재야, 이 밤중에 웬일이냐. 이분은...”

윤재가 무릎을 꿇으며 간절히 말했다.

“어머니, 이분은 예전 시약고를 관리하던

강성노 어르신입니다.
영의정의 수하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하셨습니다.
이분의 입이 닫히면 진실 또한 사라집니다.
부디 지켜주십시오.”

정 씨 부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곧 눈빛이 단단히 굳어졌다.

“칠복을 불러오너라.”

잠시 뒤, 달빛을 등에 업은 중년의 하인이 급히 들어섰다.
정 씨 부인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이르렀다.

“이분을 뒷채로 모셔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처하고,
묵을 방을 마련하라.
그리고 의원을 불러 당장 진찰하게 하여라.
상처가 깊어 보인다.”

“예, 마님.”

칠복은 고개를 깊이 숙이고 강성노를 부축해 나섰다.
강성노는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나아가며 낮게 중얼거렸다.

“... 살아서 전하를 뵐 수 있다면,
제 눈과 귀로 본 모든 것을 고하겠습니다.”

정 씨 부인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그 말을 들었다.
등잔불 아래, 그녀의 단단한 눈빛만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윤재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 밤, 집안의 안주인이 내린 결심은
그 어떤 맹세보다 무거웠다.

멀리서 닭이 첫울음을 터뜨렸다.
새벽빛이 북녘 하늘을 스치며 어슴푸레 번졌다.
이어 종루에서 묵직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침이 왔다.

궐에서 조회가 시작되자,
대신들의 행렬은 고요했으나 그 속에 번진
술렁임은 억누를 수 없었다.

누군가는

“대제학이 모든 것을 밝혔다”라고 속삭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영의정을 겨냥한 모함일 뿐”이라 수군거렸다.
그때, 영의정 김동신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고,
목소리는 낮고도 단단했다.
잠시 술렁임이 가라앉고, 조정은 숨을 죽였다.

“전하, 세자 저하의 죽음을 빌미로 거짓을
퍼뜨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소문은 바람보다 빨리 번지고,
진실은 언제나 그 뒤를 쫓게 마련이지요.
이 조정을 흔들려는 무리들을 먼저 다스리지 않는다면,
나라의 근간이 무너질 것이옵니다.”

순간, 대신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왕의 시선마저 미묘하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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