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敗), 그리고 패(覇)
편전의 공기는 이미 숨 막힐 만큼 무거웠다.
등잔불은 바람 한 점 없이 묘하게 떨렸고,
넓은 어좌 앞의 암석 같은 적막이 대신들의
어깨를 더 낮게 짓눌렀다.
앞으로 모으고 있는 손들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비단 소매 끝에서 나는 사각거림만이
긴장 위로 스며들었다.
왕은 어좌에 앉아 차갑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들고 선 영의정 김동신을 노려보았다.
“세자의 죽음, 그대 손에서 비롯된 것이 더냐.”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대신들의 등골이 곧게 굳었다.
몇몇은 감히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고개를 더 숙였다.
김동신은 사모를 고쳐 쓰며 침착한 얼굴을 지켰다.
“전하, 이는 신을 모함하려는 역적 무리들의 흉계이옵니다.
세자의 죽음을 제 탓으로 돌려 왕실을 흔들려는
자들이 있사옵니다. 신은 그저 나라의 기틀을 지키려
했을 뿐이옵니다.”
그의 말투는 단정했으나,
눈빛은 살얼음처럼 얇고 예리했다.
왕은 더 묻지 않았다.
눈빛이 차갑게 식어가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곧 진실이 드러날 것이다. 네 혀끝이 아니라,
증좌로 말할 터이니.”
그 순간 김동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좌 뒤편으로 울려 퍼지는 종각 소리처럼,
말 없는 경고가 그의 귓가를 스쳤다.
왕이 어좌에서 물러가자 대신들도 서둘러 흩어졌다.
발걸음 소리조차 서로를 피하듯 엇갈렸다.
편전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김동신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싸늘한 두려움이 번졌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매끈한 미소에 감춰졌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침착하게 전정을 나섰다.
깊은 밤.
김동신의 서재에 촛불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병법서와 지도가 빽빽이 걸려 있었고,
창호지 틈새로 스며든 바람이 종이 냄새와
먹 내음을 한데 섞어 흔들었다.
그는 홀로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왕의 눈빛이 이미 내게서 등을 돌렸다.
이대로 가면 끝이다...”
그는 잔을 탁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진동이 탁상 위의 붓통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곧 결연한 눈빛으로 방울종을 울렸다.
잠시 뒤, 측근 몇 명이 서둘러 들어왔다.
밤 길을 달려온 듯 옷깃에 먼지가 가늘게
내려앉아 있었다.
김동신은 낮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는 다른 길이 없네.
왕을 두고 더 기다릴 수는 없어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하지 않겠는가?”
심복들은 경악하며 서로 눈치를 보았다.
어떤 이는 두려움에 고개를 깊이 숙였고,
어떤 이는 광기에 취한 눈으로 무릎을 꿇었다.
“대감… 설마 전하를 거스르려는 것이옵니까?”
“거스른다? 아니, 우리가 지키는 것이네.”
김동신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서슬 퍼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조선은 이 김동신 없이는 설 수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가? 왕이 날 버렸으니,
내가 새 왕을 세울 수밖에.”
그는 명령을 이어갔다.
“사병들을 모으게. 한성 안의 병영 몇은 이미
내 손안에 있지. 남은 것은 시일과 계책뿐
수문을 여닫는 자도, 곡물을 내어주는 자도 모두 사람이니
그 사람을 쥐면 문과 창고는 스스로 열릴 것 이네.”
그는 손짓으로 다른 심복을 불렀다.
“조정의 몇몇 대신들에게 금과 벼슬을 미끼로 걸게
내일 새벽 전까지 밀서를 돌려, 입을 막아야 할 것이야.
그들의 침묵이 곧 우리의 성곽이 될 것이니
풍문을 퍼뜨릴 장터의 입도 골라두어라
‘세자의 죽음을 왕이 감췄다’는 말을 퍼뜨리면
아침 장에선 저절로 커질 것이야.”
한 심복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나, 대감... 지금은 움직임이 잦으면 눈에 띄옵니다.
의금부의 눈이...”
김동신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래서 소리 없이 움직이라 했네.
소문은 발이 없으되 천리를 가고,
금은 혀가 없으되 수백의 말을 잠재우는 법이니.”
심복들이 차례로 명을 받고 사라졌다.
어둠 속, 김동신은 홀로 남아 서책을 펼쳤다.
지도 위에 먹을 찍은 붓을 휘갈겨 큰 글자를 써 내렸다.
逆 (거스를 역)
묵직한 획이 종이를 찢을 듯 깊게 박혔다.
그 글자가 번들거리는 촛불 아래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그는 붓끝을 잠시 공중에 멈춘 채,
아무 말 없이 미소만 남겼다.
같은 시각, 한성의 골목.
달빛조차 흐릿한 어둠 속을 차무강이 걸었다.
벽돌 담장에 이끼가 눅눅히 붙어 있고,
서늘한 밤이슬이 짚신 가장자리를 적셨다.
그의 발걸음은 조용했으나, 눈빛은 칼날처럼 예리했다.
뒤따르는 군사들이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멀지 않은 곳, 김동신의 하인으로 보이는 자가
커다란 돈자루를 안고 대신의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돈자루 목에는 촘촘한 끈과 낡은 옻칠 자락이 보였다.
종종걸음으로 앞장서는 사내의 어깨가
두어 번 주위를 훔쳐보듯 떨렸다.
골목 맞은편 술집에서는 또 다른 무리들이 소곤거렸다.
“세자의 죽음을 감춘 건 전하라더라.”
“영의정 대감만이 진실을 알고 계시지.”
목소리는 일부러 낮췄으되,
들어주길 바라는 사람들처럼
문턱 쪽으로 조금씩 쏠려 있었다.
차무강은 잠시 그들의 얼굴을 오래 지켜보았다.
술기운에 비틀린 눈동자들 사이로,
말끝마다 같은 단어가 기계처럼 반복되고 있었다.
‘전하가 감췄다’, ‘영의정만이 안다’
누군가 정해준 문장처럼.
그는 고개를 돌려 군사에게 낮게 명했다.
“저 무리들을 놓치지 마라.
누가 뒤에 있는지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성급하면 증좌를 잃어버리니 오늘은 보고만 한다.”
군사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발자국이 빗물 고인 움푹한 자리를 살짝 밟고,
바로 사라졌다.
차무강은 홀로 골목 끝에 서서,
멀리 보이는 관저 쪽을 바라보았다.
기와 끝에 맺힌 이슬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영의정의 손길이 아직도 살아 있구나.
허나 이번만큼은 반드시 끝까지 밝혀내리라.’
그의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
허리춤의 끈을 다시 조이며,
그는 다른 골목으로 몸을 돌렸다.
오늘은 칼을 뽑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더 깊이 칼집을 눌렀다.
그러나 한성의 다른 집 안에서는,
또 다른 승부가 조용히 벌어지고 있었다.
사랑채 안,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등잔불이 바둑판 위를 비추며,
흑과 백의 돌이 서로의 숨통을 틀듯 밀고 당겼다.
바람은 없는데 등잔불 심지가 자꾸만 길어졌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김지헌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김동신은 이미 바둑판 앞에 앉아 흑돌을 쥐고 있었다.
“앉아라.”
짧은 명령이었다.
그 말투에는 정이 없었고, 꾸짖음도 없었다.
오직 계산만 있었다.
김지헌은 조심스레 마주 앉아 흰 돌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손끝이 떨려 돌이 바둑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마룻바닥에 부딪힌 돌이 작게 튀었다.
김동신은 태연히 그 돌을 주워
다시 판 위에 올려놓으며 미소 지었다.
“돌을 두려워하는 자는 이길 수 없지
바둑에서 가장 두려운 건, 가까운 자가 흑의
허술함을 먼저 본다는 거다.”
김지헌은 숨이 막혔다.
왕 앞에서 아버지를 고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숨이 가빠져 옷깃을 여미려 했으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떤 시험을 하기 위함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등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김동신은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흑돌을 집어 중앙에 내려놓았다.
‘딱.’
맑고 단단한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허술해 보이는 자리를 겁내지 말거라.
진짜 덫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데서 입을 벌리지.
가까운 자의 칼끝이 가장 깊이 파고드는 법…
그것이 세상의 이치니라.”
그의 손가락이 흑돌 위를 잠깐 문질렀다가 떨어졌다.
손끝에 먹 냄새가 배어 나왔다.
김지헌은 입술을 깨물며 겨우 대꾸했다.
“... 허나 덫은, 때로는 주인을 옭아매기도 합니다.”
떨렸지만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동신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가,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로 감춰졌다.
“옭아맬 만큼 허술한 주인은 오래 버티지 못하지.”
그는 돌을 굴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바둑은 흑과 백이 돌을 맞부딪히는 싸움이 아니다.
끝내 웃는 자가 모든 집을 쓸어 담는 법이지.
승부란 지키는 자가 아니라
빼앗는 자가 결정을 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단 한 수로 모든 판을 뒤엎어야 할 때가 있다."
김지헌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의 목소리와 바둑판 위의 흑돌이
점점 더 무겁게 가슴을 짓눌러왔다.
"그 한 수를 놓는 자가 세상을 거머쥐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말에
그는 백돌을 변두리에 겨우 얹고 시선을 떨구었다.
등잔불 그림자가 그의 뺨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김동신은 바둑판을 내려다보다가,
마치 별것 아닌 이야기를 건네듯 담담히 말했다.
“지헌아, 내일은 서늘할 듯하다. 옷을 좀 더 두텁게 입거라
새벽안개가 짙게 깔릴 테니.”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김지헌은 묻지 못했다.
어쩌면 묻고 싶지 않았다.
바둑판 위의 중앙은 이미 흑의 그림자로
가득 메워지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반역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조용한 추적이 시작되고 있었다.
김동신의 손끝에서는 흑돌이,
차무강의 손끝에서는 진실의 조각이
조선의 운명을 두고 맞부딪힐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밤은 길었고, 숨은 얕았다.
두 갈래의 밤은 보이지 않게 부딪히며,
조선의 운명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먼 곳에서,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의 종소리가 희미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