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판을 흔드는 자

폭풍전야

by 붕어예요

편전의 불빛은 꺼졌으나,
여운은 아직도 궁궐을 떠돌고 있었다.

왕은 처소로 돌아왔지만 마음은 무겁게 눌린 채였다.
책상 위의 죽책을 아무리 넘겨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등 뒤로 흔들리는 등잔불이 그의 심중을
그대로 드러내듯 벽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잠시 후, 차무강이 조용히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차장군, 오늘 편전에서 보지 않았는가.”

왕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힘이 있었다.

“영의정 그 자의 입술이 거짓으로 번들거렸다.
세자의 죽음을 엮어내는 혀끝, 과인은 더는 믿지 않는다.”

차무강은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전하, 신 또한 그 눈빛을 보았사옵니다.
두려움이 비치는 순간,
분명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왕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말했다.

"허나 지금 필요한 것 은 소문이 아니라 증좌다.
섣불리 칼을 뽑으면 되레 당할 수 있음이야
그대는 증좌를 찾으라. 서두르되, 소란은 피해야 한다.”

차무강의 눈빛이 번뜩였으나 곧 차갑게 가라앉았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한 치의 오차도 남기지 않고.
반드시 증좌를 찾아 전하 앞에 받치겠나이다.”

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손에 나라의 운명이 달렸다.
과인은 그대를 믿는다. 그 신념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네”

차무강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전하께서도 부디 어심을 굳게 지켜주시옵소서.”

왕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다가 곧 다시 굳어졌다.

그 시각, 영의정 김동신의 집 사랑채.
등잔불 아래, 김동신은 찻잔 앞에 앉아 있었다.

찻잔을 들고 손끝으로 돌리며 심복들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영의정이네.”

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무거웠다.

“내가 움직이라 하면 조정이 움직이는 것이지.
그대들, 그 뜻을 모르진 않겠지?”

심복들이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감히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김동신은 입꼬리를 서늘하게 올리며 말을 이었다.

“사병들은 이미 준비가 끝났네. 그리고
풍문은 이미 장마다 퍼졌으니 내일 해가 뜨면,
백성들의 혀가 우리 편이 될 것이야.”

심복 하나가 두려움에 떨며 입을 열었다.

“대감, 혹여라도 일이 그리치는 날에는...”
김동신의 눈빛이 번쩍이며 번개처럼 치켜 올랐다.

“닥쳐라! 판은 이미 짜였다.
이제 남은 건 한 수뿐이다.
내가 두는 수로 나라의 운명이 갈릴 것이다.
그리고 그 수를 이길 자는 이 조선에 존재하지 않는다.”

심복들은 숨도 쉬지 못한 채 고개를 조아렸다.
김동신이 손을 휘저으며 명했다.


“물러가라. 내 말이 곧 조정의 뜻임을 잊지 말라.”


심복들이 조심스레 물러나자,

사랑채는 고요해졌다.
고요한 방안에는 김동신의
교활한 미소만 드리워졌다.
잠시 후, 하인이 급히 들어와 엎드렸다.

“대감마님 정 씨 마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김동신은 눈썹을 살짝 추켜올리더니 말했다.

“이 밤중에? 뫼시게”

이윽고 문이 조용히 열렸다.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정 씨 부인이 곱게 들어섰다.
등잔불이 그녀의 옆얼굴을 은은히 비추었다.
김동신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이 밤중에 부인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정 씨 부인은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되,
시선은 단정히 들어 올렸다.


“대감, 돌 하나가 잘못 놓이면 수십 집이 무너지는 법이지요.”

김동신의 시선이 멈췄다.
정 씨 부인이 집어든 흑돌 하나가
그의 앞에 있는 바둑판 위에
‘딱’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부인,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건지…

이 늙은이는 도무지 알 수가 없소이다.

허나 참으로 아는 것이 많으신 듯하오.

부인께서는 전하의 아우라 하나,

결국 후궁의 소생 옹주가 아니시오?

깊이 발을 들였다간 뼈아픈 실수를 겪게 될 겝니다.


정 씨 부인은 눈빛을 곧게 세우고 담담히 대꾸했다.

피가 섞였다는 이유 하나로 세상은 저를 왕족이라 부릅니다.

달갑지 않을 때도 있었으나,

그 신분 덕에 더 깊이 꿰뚫어 볼 수 있었지요.”


“허허.”

김동신이 비웃듯 웃었다.

“부인께서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드시는 게요?”

정 씨 부인은 살짝 미소지으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받아쳤다.

“대감, 그럴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판이 아무리 치밀하다 하여도,

예기치 못한 한 수가 모든 집을 무너뜨리기도 하는 법.

그저 그리 말씀드리고자 함이옵니다.

김동신의 눈빛이 번득였으나,
이내 미소로 감췄다.

정 씨 부인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히 일어나
발걸음 소리도 남기지 않고 방을 나섰다.
남은 건, 바둑판 위에 놓이지 못한 흑돌 하나뿐이었다.

한성의 밤, 흐릿한 달빛 아래.
차무강은 군사들을 이끌고 골목 어귀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무거운 자루를 품은 하인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차무강이 나섰다.

“멈춰라.”

하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품을 움켜쥐었다.

“소, 소인은 그저 심부름을...”

차무강은 자루를 거칠게 빼앗았다.
금빛이 흘러내렸다.

“심부름이라? 이 자루가 향하는 곳이
누구의 집인지 상세히 고하라.”

하인은 떨며 무릎을 꿇었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그저 명을 따른 것뿐이옵니다!”

차무강은 군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낮게 명했다.


“잡아가라. 주인과 그의 명을 실토케 하라”

잠시 후, 군사들이 다시 모였다.
그들은 이슬에 젖은 어깨를 털며 보고를 올렸다.

“술집 안에서 똑같은 말이 흘러나옵니다.
세자의 죽음을 전하가 숨겼다는 소문입니다.”

“영의정댁 하인이 큰 돈자루를 들고
병조참판 댁에 들어갔습니다.”

“병영 쪽에서도 이상한 움직임이 있습니다.
교대가 불필요하게 잦습니다.”

차무강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숨을 뱉었다.

“이제는 의심이 아니다.
영의정이 판을 짜고 있다는 말, 틀리지 않다.”

군사들이 숨죽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차무강은 허리끈을 바짝 조이며,
검 손잡이에 잠시 손을 얹었다가
곧 떼어내며 낮게 중얼거렸다.

“잊지 말거라. 오늘 우리가 본 것, 들은 것...
모두 조각이 되어 결국 맞춰질 것이다.”


차무강이 군사들을 돌려보내고 홀로 서 있는 그때,
어둠 속에서 가냘픈 발자국 소리가 다가왔다.
등잔불도 닿지 못하는 그림자 속에서
정 씨 부인이 나타났다.

“아니 부인, 부인께서 이 시각에 어찌...”

차무강의 목소리에 놀람이 섞였다.

“장군, 이제는 소첩이 말해야 할 때가 된 듯합니다.”

정 씨 부인의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흔들림이 없었다.
차무강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정 씨 부인이 잠시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어 갔다.


“강성노...
장군께서 그 자를 찾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소첩이 숨겨 두었습니다.”

차무강의 얼굴에 번쩍 놀라움이 스쳤다.
달빛이 흐릿하게 번져 두 사람의 그림자를 늘였다.

“그 말씀 사실입니까?”

정 씨 부인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윤재의 간청도 있었사오나,
언젠가 이와 같은 날이 올 듯하여
소첩이 거두어 두었사옵니다.
출가외인이라 하나, 소첩이 엄연히
세자저하의 고모 아니겠사옵니까.
조금이라도 전하와 장군께
힘이 되고자 함일 뿐이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차무강은 정 씨 부인의 손을 잡고 낮게 말했다.

“... 부인, 내가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소
참으로 고맙소이다.”

등잔불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겹쳐졌다.
그 그림자는 마치 한 몸처럼 벽에 드리워져,
폭풍을 앞둔 고요 속에 더욱 굳세게 이어졌다.

그 길로 정 씨 부인은 차무강을 집 뒤채로 이끌었다.
작은 등불 하나에 의지한 채 어둠이 깔려 있었고,
낯선 나무문이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차무강 역시 좀처럼 드나들지 않던 곳이었기에,
이곳은 마치 다른 세상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잠시 후, 정 씨 부인의 손짓에 따라,
어둠 속에서 한 노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는 굽었으나 걸음마다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고,
손끝은 세월에 닳아 거칠었다.
차무강은 순간 눈썹을 좁히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자가 오래전 시약고를 맡았던 자이옵니다.”

정 씨 부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또렷했다.
노인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히 장군 앞에 인사 올리옵니다. 강성노라 하옵니다.”

차무강이 굳은 눈빛으로 다가섰다.

“그대가... 세자저하의 탕약이 다려지던 날,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이오?”

강성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이내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날 소인은 탕약의 빛이 평소와 다름을 눈치챘사옵니다.
거듭 살펴보니 알 수 없는 낯선 약재가 뒤섞여 있었지요.
냄새 또한 평소와 달라, 석연치 않다 여겼사옵니다.
신은 곧 윗사람께 아뢰었으나,
돌아온 것은 꾸짖음과 내쫓김뿐이었사옵니다.”

차무강의 눈이 번쩍였다.

“그렇다면... 그 약에 손을 댄 자가 누구인지 보았는가?”

강성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낮게 목소리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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