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붉은 용이 깨어나다.

폭군과 역적의 밤

by 붕어예요

새벽녘, 한성의 하늘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궁궐 담장 너머로는 은밀히 모여드는
발걸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바람은 싸늘했고,
하늘은 아직 별빛조차 옅게 남아 있었으나
사람들의 숨결은 뜨겁고 거칠었다.
갑옷을 걸친 자들, 검을 품은 자들,
그리고 권세와 야심에 눈이 먼 대신들까지...
그 중심에 선 이는 영의정 김동신이었다.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무리를 훑어보았다.
얼굴에 두려움은 한 점도 없었다.
오히려 담담한 빛, 아니 비웃음마저 비치는 표정이었다.

“오늘 밤, 조선의 근본을 바로 세울 것이다.”

차갑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모여든 자들의 눈빛에 불길이 번졌다.

“전하는 더 이상 군주가 아니오!
간언을 막고 선비들을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폭군일 뿐!
조선은 글과 의리로 세운 나라다.
목소리를 잃은 선비와 백성이 어찌 이 나라를 떠받치겠는가!”

그의 주먹이 추켜올려지자 군중의 함성이 터졌다.
철갑이 서로 부딪히고 칼자루를 움켜쥔 손이 떨렸다.
반역의 불길은 이미 타올라 궁궐 담장 너머로 번져가고 있었다.

편전 안, 등잔불이 크게 흔들렸다.
밖에서부터 밀려드는 함성은 마치
파도처럼 궁 안을 뒤흔들었다.
신하들은 고개를 깊숙이 떨군 채 숨을 죽였다.
누구도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차무강이 무릎을 꿇으며 고했다.

“전하, 김동신이 무리를 이끌고 궁으로 들이닥치고 있사옵니다.
일부 군사와 대신들까지 그에게 가담하였나이다.”

왕은 한동안 침묵했다.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등잔불만이 바람에 흔들렸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그 자가 사대부의 이름을 빌려 역모를 꾀하고 있다.
허나 그 속은 탐욕이다. 오늘 반드시 그 죄를 물을 것이다.”

왕의 눈빛이 번뜩였다.
차무강은 두 주먹을 바닥에 짚으며 외쳤다.

“신 차무강, 목숨을 걸고 명을 받들겠나이다.”

쾅—!

편전의 문이 격렬히 열리며
철갑으로 무장한 역모군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중심에서 김동신이 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전하.”

그는 고개만 짧게 까딱하며 느긋한 미소를 보였다.

“소신이 감히 이리 나선 까닭은
조선의 앞날이 근심스러워서이옵니다.
저잣거리에서는 세자저하의 죽음을 두고
흉흉한 소문이 떠돕니다.
심지어 전하께옵서 연루되셨다는 말까지 들려옵니다.
허허… 참으로 기가 막히지 않사옵니까?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들은 이야기를 옮길 뿐이지요.
전하와 신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자들의
헛짓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디 윤허하소서, 신이 직접 낱낱이 밝혀내겠나이다.”

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빛은 번개처럼 차갑게 내리 꽂혔다.

“네 놈은 밝히려는 것이 아니라
감추려는 것이다. 내 모를 줄 알았느냐?
반드시 네 놈의 가면을 벗겨낼 것이다.”

김동신이 손이 번쩍 들자 검이 일제히 뽑혀 나왔다.
쇳소리가 폭발하며 불꽃이 튀었다.

“전하를 호위하라!”

차무강의 외침과 함께 숨어 있던
호위군이 사방에서 솟구쳤다.
순식간에 칼과 방패가 부딪히며
편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핏방울이 허공에 흩날렸고,
바닥은 순식간에 선혈로 젖었다.
차무강은 선두에서 돌진했다.

창대를 쳐내고 목덜미를 베어내자 피가 얼굴을 덮었다.
숨소리조차 가빠졌으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밀어붙여라!”

호위군이 파도처럼 밀려들자
역모군의 대열이 흔들렸다.
김동신은 뒤에서 이를 악물고 외쳤다.

“겁내지 마라! 오늘만 넘기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무사들은 차례차례 쓰러졌다.
철갑이 갈라지고, 칼이 바닥에 나뒹굴고,
비명마저 끊겼다.
마침내 숨 막히는 고요가 찾아왔다.
김동신의 곁에는 더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차무강이 그의 팔을 꺾어 무릎 꿇렸다.

“역적 김동신, 더 도망칠 곳은 없다!”

무릎 꿇은 김동신은 끝내 고개를 들고 웃었다.

“허허… 전하. 겨우 이 정도로 신의 뜻은 꺾이지 않을 것 이옵니다.
이 나라의 근본이, 어찌 군주의 칼끝 하나에 사라지겠습니까?”

왕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등잔불에 길게 겹쳤다.

“네 놈이 더럽힌 것은 조선의 뿌리다.
그것은 대의가 아니요, 탐욕을 감춘 껍데기일 뿐이다.”

칼날 같은 목소리가 편전을 울렸다.

“목숨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편전은 다시 고요해졌다.
그러나 그 고요는 더 서늘했다.
왕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 시각, 서화의 집.
등잔불 앞에 앉아 있던 그녀에게
하인이 숨 가쁘게 속삭였다.

“아씨, 영의정 대감께옵서 역모를 꾀하다 붙잡히셨다 하옵니다!”

서화는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
손끝에서 힘이 빠져 무릎 위에 올린 손이 덜덜 떨렸다.

‘조부께서… 역모를…?’

그녀의 뇌리에 스친 것은 다정한 기억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무섭게만 굴던 조부의 차가운 눈빛,
권세에 취해 가족마저 누르던 그림자였다.
그러나 그가 역적으로 끌려간 순간, 서화의 어깨 위에는
‘역적의 손녀’라는 낙인이 거대한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새벽 햇살이 스며들지 못한 의금부 뜰.
쇠사슬에 묶인 김동신이 무겁게 끌려 들어왔다.
전날 밤의 패배가 무색하게도
그의 눈빛은 여전히 거만했다.
신문관이 목소리를 높였다.

“영의정 김동신, 역모를 꾀한 죄를 인정하는가”

김동신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역모라니… 나는 폭군을 몰아내고
숨 쉴 길을 열고자 한 것뿐.
언젠가는 역사가 내 말을 증명할 것이네.”

신문관이 탁자를 내리치며 외쳤다.

“감히 전하를 폭군이라 칭하는 것이오!”

그러나 김동신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의 오만한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 시각 편전 안,
왕은 대신들을 불러 모아 자리에 앉았다.
어젯밤 전투의 여진 탓인지
신하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숨소리조차 무겁게 울렸다.
왕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김동신은 역적이다.
그러나 그의 말이 선비들의 마음을 흔들었음을 나는 안다.
나라를 위하는 직언은 내가 기꺼이 듣겠다.
허나 사욕을 위장해 대의를 빙자한다면,
그 순간부터는 용서치 않을 것이다.”

등잔불이 흔들리며 대신들의 얼굴을 비췄다.
누군가는 식은땀을 훔쳤고,
누군가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왕의 시선은 돌처럼 단단했다.

“조선은 더는 허울뿐인 명분에 무너지지 않는다.
내가 이 나라의 기둥이 될 것이다.”

대신들은 일제히 이마를 짓누르며 엎드렸다.
편전 안은 숨조차 크게 내쉴 수 없는 정적에 잠겼다.
그때, 차무강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갑옷에는 말라붙은 피가 선명했고,
왼팔에는 붕대가 느슨히 감겨 있었다.

“전하, 어젯밤 역적을 진압했사옵니다.
허나 김동신의 무리들이 모두 잡힌 것은 아니옵니다.
궁 밖 곳곳에 흩어진 잔당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사온즉,
반드시 뿌리째 도려내야 하옵니다.”

왕은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다. 불씨를 남기면 화마가 다시 이는 법.
그대가 나서서 그 뿌리를 모조리 뽑아내라.”

차무강은 두 주먹을 바닥에 깊이 짚었다.
그의 목소리는 짧지만 단단했다.

“신 전하의 명을 받들어 역당 무리들을
잡아들이겠나이다.”

새벽 공기는 차갑고 축축했다.
전날 밤 편전을 물들인 피비린내가
아직 코끝에 맴도는 듯했다.
차무강은 앞장서 말없이 산길을 올랐다.
그의 뒤를 따라 철갑을 두른 군사들이
발소리를 죽인 채 움직였다.
어느새 하늘은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으나
숲 속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대장군, 정말 이곳에 숨어 있겠사옵니까?”

부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차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통에 의하면 도망친 놈들은
이 산속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쥐새끼라도 끝까지 쫓아내야 한다.”

말끝에 그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산길은 가팔랐다. 바위틈마다 풀잎이 젖어 있었고,
나뭇가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조차 크게 울려 퍼졌다.
군사들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잠시 후, 앞서 가던 척후병이 손을 들어 올렸다.

“대장군! 저 앞 바위 아래, 불빛이 새어 나옵니다.”

모두가 숨을 죽였다.
차무강은 허리를 낮추며 나지막이 지시했다.

“둘러싸라. 한 놈도 놓치지 마라.”

군사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풀숲이 흔들리고,
갑옷이 스치는 소리가 숲 속을 가득 메웠다.
큰 바위 아래 동굴 같은 은신처.
안에서는 은은한 등불이 깜박이고 있었다.
몇몇 잔당들이 모여 앉아 술을 나누며 중얼거렸다.

“대감께서 붙잡히셨다니, 거짓말일 게다.
저들이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리는 걸게야.”

“아니야, 내가 들은 소식은 분명해
이제 우릴 찾아낼 날도 머지않았어.”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며 차가운 바람이 들이쳤다.
군사들이 들이닥치자 잔당들이 벌떡 일어났다.

“역적 무리들! 항복하라!”

차무강의 목소리가 번개처럼 울렸다.
그러나 잔당들의 눈에는 공포보다 광기가 서려 있었다.

“차무강! 네놈이 감히 대감을 욕보였구나!”

그들이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칼부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불빛이 흩날리고, 움막 안은 피와 쇳소리로 가득 찼다.
차무강은 몸을 비틀며 창끝을 쳐내고,
곧장 앞으로 파고들었다.

“항복하면 여기서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의 외침에도 대답은 비명과 날 선 칼끝뿐이었다.

“죽어라—!”

잔당의 검이 목을 향해 내리 꽂히자,
차무강이 한 발 옆으로 비켜서며 단칼에 목덜미를 베어냈다.
피가 튀어 얼굴을 덮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구나.”

군사들이 밀어붙이자 은신처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몇 차례 비명이 더 울리고,
나머지 소리는 이내 숲 속에 삼켜졌다.



여기까지 같이 달려와주신 모든 분들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리하여, 인연>은 총 25부작으로

연재 예정입니다!

1화를 연제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화네요.ㅎ

조금만 더 힘내서 마지막까지

함께 해주실 거죠?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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