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매화가 지고 말았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by 붕어예요

며칠 전 밤, 김동신의 역모가 세상에 드러나기 전.
정 씨 부인의 안내로 차무강은 은밀히 강성노를 마주했다.
강성노는 등불에 비친 그림자 속에서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장군...”

낮게 깔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날 세자저하의 탕약에 다른 약재가 섞였다는 사실,
소인의 눈으로 본 것은 아니옵니다.
허나 그 모든 일을 똑똑히 목도한 의녀가 있사온데,
그 여인 본디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세상과 담을 쌓고
숨어 지내고 있사옵니다.
지금 그 의녀의 거처를 아는 이는 오직 소인 뿐이옵니다.”

차무강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러나 곧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었다.
진실을 본 눈이 아직 살아 있다.
지켜내야 한다.
그는 결연히 눈을 뜨며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그 여인에게로 나를 안내하시오.”

산길은 매서운 바람에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앙상한 손처럼 흔들리며 바람을 막으려 애썼다.
차무강은 강성노와 나란히 걸으며,
발자국마다 마음속 결심을 단단히 눌러 새겼다.
긴 여정 끝에 허름한 초가집 하나가 눈앞에 나타났다.
강성노가 문을 두드리며 조심스레 말했다.

"성연이 안에 있는가? 날세 강성노일세"

안에서 한참 인기척이 없다가,
이윽고 조심스러운 발소리가 다가왔다.
삐걱거리는 문이 열리자 창백한 얼굴의
중년의 의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강성노 어르신?”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성노는 숙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 연통도 없이 어찌 이리 오셨사옵니까?
사람들 눈에 띄면 어찌하시려고...”

"뒤따르는 자는 없으니 안심하거라.
그동안 잘 지냈느냐? 너에게 소개해 드릴 분이 계셔서
내가 이렇게 모시고 왔느니라"

그는 몸을 옆으로 비키며 차무강을 가리켰다.

“이 분은 차장군님이시다. 공손히 인사드리거라.”

의녀는 차무강을 보고는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낯선 기세가 방 안 공기를 서늘하게 얼렸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리고, 침묵은 길어졌다.
차무강은 굳센 목소리로 말했다.

“염려 마시오. 나는 다만
세자저하의 억울함을 밝히고자 왔을 뿐이오."

의녀는 눈을 감았다가 한참 망설인 끝에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 그날, 판윤대감 쪽 사람이 세자의 탕약에
낯선 가루를 섞는 것을 제 두 눈으로 보았사옵니다.
소인을 보고 놀라 도망치던 그 자의 소매 틈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졌사온데...
그 서찰에는 판윤대감, 아니, 지금의 영의정 대감이
쓴 듯한 글과 인장이 찍혀 있었사옵니다.”

그녀는 오래된 서찰을 꺼내 차무강에게 내밀었다.
종이는 세월에 바래 있었으나,
그 위의 붉은 대나무 인장과
당시 판윤의 수결은 또렷했다.
차무강은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매화가 지려 하니 겨울의 깊은 밤이 다가왔구나.
뜨거운 입김도 눈을 녹이지 못하듯,
아스라이 쓰러지는 매화 또한 제 운명을 알 터.
너의 눈앞에 펼쳐질 봄날을 어찌 마다하겠느냐.
― 판윤 [대나무 인장]

은유 속에 감춰진 살의가
종이 위에서 선명하게 일어났다.
매화는 분명 세자를 뜻 하는 듯하였다.
세자의 생명을 거두라는 명령...
차무강의 손끝이 떨렸으나,
눈빛은 오히려 더욱 굳세 졌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 그자의 얼굴을 기억하시오?"

며칠 뒤, 차무강은 어둠 속에서 비장을 붙잡았다.
의녀가 말했던, 바로 그 서찰의 주인이었다.
포승줄에 묶여 끌려온 비장은, 완강히 부인했다.

“소신은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모두 거짓이옵니다!”

차무강은 쪽지를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네 것이 아니더냐?
당시 판윤의 수결과 인장,
그리고 세자저하의 약에 독을 탄 바로 그날!”

비장의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것만으로 어찌 소신을
이리 몰아세우실 수 있사옵니까?”

차무강의 칼집이 탁, 바닥을 내리쳤다.

“더 이상 거짓을 입에 올리지 마라.
지금이라도 네 놈의 목숨을 거둘 수도 있다.
허나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이다.
네 죄를 뉘우칠 단 한 번의 길 말이다.”

오랜 침묵 끝에,
비장은 무너져 무릎을 꿇었다.

“... 장군, 소신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옵니다...
당시 판윤이셨던 영의정 대감께옵서
저를 불러 세자저하의 탕약에 가루를 섞으라 명하셨습니다.
그 대가로 벼슬을 약속받았사옵니다...”

차무강은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 죄를 네 입으로 전하 앞에서 말해야 할 것이다.”

비장은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며칠 뒤, 조정의 조회.
장중한 궁궐에 대신들이 모두 모였다.
차무강은 결박된 영의정과 비장을 끌고 나왔다.
긴장감이 가득한 공기 속에서 왕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왕은 무겁게 물었다.

“오늘, 과인은 진실을 듣고자 한다.
네 입으로 그날의 일을 소상히 말하라.”

비장은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차무강이 쪽지를 꺼내 들자 조정이 술렁였다.
왕의 음성이 천둥처럼 울렸다.

“과인을 끝까지 속일 셈이냐?”

그 순간, 비장의 어깨가 무너져 내렸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전하, 소신이 죄인이옵니다.
당시 판윤이셨던 영의정 대감 께서 내리신 명에 따라...
세자저하의 탕약에 독을 섞었습니다.
약속된 벼슬을 믿고 그런 참혹한 죄를 지었나이다.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조정은 돌처럼 굳어졌다.
모든 시선이 결박이 되어 무릎 끓고 있는
영의정 김동신에게 쏠렸다.
붉은 대나무 인장이 찍힌 종이는
세상을 향해 그의 죄를 웅변하고 있었다.
왕의 목소리가 궁궐을 뒤흔들었다.

“김동신, 이제 네가 스스로 답할 차례다.”

그러나 그는 태연하게 앉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전하,”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고요했다.

“한낱 비장의 말을 믿으시겠사옵니까.
저따위 천한 자의 거짓이,
나라의 근본을 흔들 수는 없사옵니다.”

대신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몇몇은 고개를 숙이고,
몇몇은 은근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의 분노가 치솟았다.

“김동신, 네 놈의 수결한 쪽지가 나왔다.
어찌 감히 부인하느냐!”

김동신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그 종이가 진실이라면,
어찌하여 지금에서야 세상에 드러났겠사옵니까.
이는 저를 음해하려는 계략일 뿐이옵니다.”

그 순간, 결박된 비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전하! 증좌는 저 종이만이 아니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비장은 울먹이며 소매를 거칠게 걷어 올렸다.
그곳에는 검푸른 대나무 문신이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궁궐이 얼어붙은 듯 정적에 잠겼다.

“영의정의 사람들은 모두...”

비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이 대나무 문신을 새겨야 했습니다.
그것이 충성의 징표요,
서로를 알아보는 은밀한 표식이었나이다.”

조정은 술렁였다.
몇몇 대신들은 자신도 모르게 소매를 움켜쥐었고,
다른 이들은 식은땀을 훔쳤다.
공포와 충격이 한꺼번에 번졌다.
왕의 눈빛은 번개처럼 날카로웠다.

“도승지, 여기 있는 모두의 손목을 확인하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이 자리에서 목을 베어도 좋다!”

도승지가 앞으로 나서자,
내금위들이 칼자루 위에 손을 얹고 긴장하였다.
이내 이곳저곳에서 소매가 걷히니,
붉은 살 위로 검푸른 대나무 문양이 드러났다.
순간 조정은 술렁이며 장내가 요동쳤다.
공포에 질린 일부 대신들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왕은 옥좌 위에서 분노에 몸을 떨며
천둥 같은 음성을 터뜨렸다.
왕의 분노가 폭발했다.

“김동신! 네가 감히 세자를 시해하고도
목숨을 부지하고자 거짓을 고한단 말이냐!”

김동신은 처음으로 얼굴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곧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전하... 신은 나라를 위하려 했을 뿐이옵니다.”

“폐하!”

차무강이 앞으로 나섰다.

“들으셨사옵니까?
지금 저자의 입은 스스로를 구하지 못해,
결국 그 죄를 시인하고 있사옵니다.”

대신들이 웅성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부정할 수 없사옵니다.
나라의 근본을 뒤흔든 대역죄인이옵니다!”

왕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로 그때, 문 밖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대비마마 행차시옵니다!"

노세 했으나 눈빛과 풍채만큼은
여전히 위엄 넘치는 대비가,
편전 안으로 고고히 들어섰다.
순간 장내가 얼어붙은 듯 정적에 잠겼다.
왕은 어안이 벙벙하여 말을 잇지 못하다가 낮게 내뱉었다.

“어마마마... 어찌 이 편전에 친히 나오셨사옵니까.”

대비는 결박된 김동신을 물끄러미 보더니,
곧 왕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주상, 영의정을 풀어주세요.”

왕이 경악하여 목소리가 떨렸다.

“...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이 자는 세자를 시해한 자이자 역모까지
서슴지 않은 자이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증좌가 드러났사온데! 그런데 어찌...”


대비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이 어미가 명한 일입니다.”

대신들이 크게 술렁였다.
왕은 혼비백산한 듯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어마마마... 지금 소자가 들은 이 말씀이 참이옵니까?
세자 시해와 역모... 이 모든 일을...
어마마마께서 명하신 일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렇소, 주상 이제 어찌할 것이오?
이 어미를 내치기라도 하시겠습니까?
우리 효자인 주상께서 어미에게 그럴 수는 없지요."

순간 편전 안에 정적만이 흘렀다.
왕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 후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했다.

"당장 어마마마를 처소로 모셔 가되,
단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라.
또한 그 누구도 절대 드나들지 못할 것이니라.
알겠느냐!"

대비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이 스쳤다.
그리고 그 옆엔 숨이 멎을듯한 김동신의
좌절함 만이 공존하였다.

"놔라 이놈들!! 주상!! 어찌 어미에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 모든 것이 주상과 이 나라의 안녕을 위한 일들이었음을
어찌 모른단 말입니까!! 주상!!!!"

금군들의 손에 붙잡힌 대비가 발악하며 끌려나갔다.
왕은 떨리는 손으로 옥좌를 짚고 일어나,
결박된 김동신을 향해 천둥 같은 목소리를 터뜨렸다.

“김동신, 네 놈의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당장 이 놈을 의금부로 끌고 가 고신을 하라!
모두 토해낼 때까지 고신을 멈추지 말라!”

왕의 음성이 천둥처럼 편전을 뒤흔들었다.
대신들은 모두 고개를 떨군 채 숨조차 삼키지 못하였다.
잠시 후, 왕은 어지러운 듯 옥좌에 몸을 기댄 채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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